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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불교연구원 불교연구 불교연구 제38호
발행연도
2013.1
수록면
261 - 299 (3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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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고려후기에 간행된 ‘법화경 계환해’의 현존 판본을 조사하고, 그 간행 배경 및 사상사적 의미에 대해 재고찰해 보았다. 그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법화경 계환해[法華經要解]는 송의 임제종 승려 戒環이 화엄과 법화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법화경󰡕을 주석한 것이다. 때문에 고려후기 천태종의 사상 경향을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서책이다. 선행 연구에서 계환해가 1240년 백련결사에서 처음 간행되었고, 이후 고려후기 법화경은 대부분 계환해였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런데 계환해 관련 현존 판본과 문헌 기록을 조사해본 결과, 계환해가 1240년 백련결사 보현도량에 처음 간행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이후 우왕대인 1382년에 가서야 다른 판본이 나온다. 문헌상에서도 1380년대에야 계환해 관련 기록이 등장한다. 1240년 백련결사 간행본의 발문을 보면, 이때의 계환해 간행은 집정자 최우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1240년 이후로도 법화경 원전본이 다수 간행되었음은 물론, 고려후기에 유행한 법화경 사경은 원전본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 계환해가 원전본 및 다른 주석서들보다 성행하게 되는 직접적인 배경은 우왕대(1375~1388) 간행본에서 찾을 수 있다. 1380년대에 들어 천태종에서는 화엄의 수용 및 계환해의 간행․보급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는 조인규 가문의 세력 위축이라는 여건 변화와 임제선풍의 급속한 확산이라는 외부적 상황에 직면한 천태종의 생존 전략이라고 판단된다. 천태종의 고유성, 차별성만을 강조하지 않고, 화엄이나 선과 같은 다른 사상과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계환해 관련 기록에 천태종 승려 了圓(懶殘子), 休上人, 神照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모두 고려말 천태종을 이끌던 妙慧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다. 1392년 고려말 천태종의 本寺인 만의사에서 행해진 법회에서는 330명의 천태종 승려가 참여한 가운데 계환해를 강의하였다. 이는 고려말 조선초가 되면 대부분의 천태종 승려들이 계환해를 수용하였음을 말해준다. 고려후기 천태종이 백련사계와 묘련사계로 나눠져 있었다는 견해가 있는데, 계환해 수용 태도에서는 이러한 구분을 찾기가 어렵다. 계환해는 조선시대에 들어 더욱 활발히 간행되었다. 고려말 판본을 복각하기도 하고 새롭게 판각하기도 하였다. 특히 1405년 조계종 승려 信希가 발원하고 成達生이 직접 필사에 참여하여 전라도 안심사에서 간행한 판본은 이후 계환해 유행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본 연구는 계환해의 유통 상황을 통해 고려후기 천태종, 나아가 불교계 전반의 사상 경향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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