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간문이란 흔히 특정한 대상에게 안부와 용건을 묻는 글로 발신자와 수신자 간의 인간관계가 기본이 되는 글이며, 흔히 우송되는 담화라는 표현을 쓴다. 이 논문에서 분석의 대상이 되는 서간문은 화자가 자신의 고유한 삶을 수신자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 “자서전적 서간문(la correspondance autobiographique)”으로 명명하였다. 부연하자면, 화자가 자신의 과거나 현재의 삶에 대해 Auto(스스로)/bio(전기를)/graphie(적은) 글로 화자가 발신자인 동시에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이 논문에서는 먼저 “자서전적 서간문”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그다음에는 폴 부르드(Paul BOURDE)가 미슐레(Jules MICHELET)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 및 구성에 대해 살펴본다. 부르드의 편지를 고찰하는 이유는 먼저 랭보와 같은 동시대를 살았고 같은 이상을 가졌던 한 예비 시인인 그를 이해하기 위함이지만, 무엇보다 그의 편지가 랭보의 서간문일 수 있다는 미카엘 파캔함 교수(Michael PAKENHAM)의 견해를 고찰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부르드의 편지에 나타난 내용을 랭보의 전기와 비교하며 과연 이 편지가 랭보의 전기와 일치하느냐를 살펴본다.
그다음은 랭보의 자서전적 서간문에 나타난 허구적 글쓰기에 대한 분석과 19세기의 젊은 두 예비 시인의 현실과 이상을 서로 비교해 본다. 랭보는 샤를빌, 부르드는 리용에 살았고, 나이는 각각 16세와 19세라는 차이점은 있지만, 자신의 고향을 벗어나 파리에 입성하여 기자나 시인으로 삶을 살고자 했던 점은 같다. 이들은 시인이 되기 위해 먼저 자신의 도시에 있는 시인(랭보는 드메니, 부르드는 슐라리에게)과 만나며 시 창작을 위한 조언을 받았고, 그 이후에는 명사들인 테오도르 방빌(Théodore de BANVILLE)과 쥘 미슐레에게 각각 도움을 청했다. 이들은 각자 선택한 명사에게 자신의 삶과 처한 어려움을 설명하고, 랭보는 방빌에게 “손을 내밀고 저를 조금 일으켜 주세요. 저는 아직 어립니다. 부디 제 손을 잡아주세요 Levez-moi un peu: je suis jeune: tendez-moi la main...”, 그리고 부르드는 미슐레에게 “저를 거칠게 대하지 마세요, 그리고 만약 얼굴에 미소가 필 때, 저를 위해서도 잠깐 웃어주세요 Ne me recevez pas trop mal, et, si le sourire va si bien au visage, souriez moi un peu”라고 호소한다. 이러한 간절한 호소는 단순히 현실적 어려움을 모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자신들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절실한 비명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명사의 도움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랭보의 경우 파리에서 방빌을 만났고 또한 도움을 받기는 했으나, 그리 큰 도움이 아니었고, 부르드의 경우 그가 결과적으로 유명한 기자나 프랑스 문학사에 언급되는 작가가 되지 못한 것으로 보아 미슐레의 도움은 없었고 따라서 그가 시인의 꿈을 포기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본 연구의 마지막 부분(3-2항)에서는 부르드의 편지가 랭보의 편지일 가능성이 있다는 미카엘 파캔함 교수의 의견에 반론하였다. 그는 불의 아들 랭보(1994)를 통해 부르드의 편지를 “랭보의 미발표 서간문(une lettre inédite de Rimbaud)”으로 소개하였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 부르드의 편지에 나타난 내용과 랭보의 삶에 대한 비교 그리고 서명과 필체의 고찰 결과 이 편지가 랭보의 서간문이 되기에는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사료된다. 이 편지에 나타난 내용이 랭보의 전기와 일부 유사한 점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기자나 시인이 되고자 하는 점, 공화주의자, 경제적 어려움의 호소 그리고 이미 성공한 명사에게 도움을 받아 파리에 입성하려는 방법 등은 랭보와 같다. 하지만, 과거의 삶과 나이, 주소 그리고 특히 서명이나 필체 등에서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기존의 랭보 연구자(부이얀 드 라코스트, 앙드레 귀요, 스티브 머피 등)에 의해 이미 밝혀진 랭보 필체의 독특한 특징(끝을 오른쪽으로 둥글게 말아 올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육안으로도 확연히 구분될 만큼 형태가 서로 다르다. 예를 들어 부르드의 서명은 성과 이름 모두 대문자로 쓴 형태이며, 그의 필체는 여성의 필체처럼 형태가 부드럽고 또한 크기가 작다. 반면, 랭보의 필체는 힘이 느껴지는 남성적인 필체이며, 서명 역시 <그림 2>에서 보듯 앞의 대문자가 상대적으로 매우 크고 끝 단어는 소용돌이 모양처럼 큰 원을 그려 장식했다. 그리고 시에 있는 대문자들도 마치 시선을 끌려는 듯 랭보는 둥근 선이나 원형을 부풀리는 방식으로 장식하고 또 추어올리는데, 이는 부르드의 단순한 형태의 필체와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위와 같은 결과를 통해 폴 부르드의 편지가 랭보의 것이 아닌 것으로 사료되지만, 본 연구는 19세기 프랑스라는 같은 시공간에서 비슷한 나이에 시인의 꿈을 꾸는 두 예비 시인의 현실과 이상을 비교하며 그들의 보편적인 정서를 읽을 수 있다는 점은 분명히 흥미롭다고 하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랭보의 서간문에 나타난 허구적 글쓰기는 사실에 대한 진실의 탐구 이외에 그의 성격과 심리적 상태를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왜 자서전적 서간문에서 자기 아버지의 삶을 자신의 것처럼 소개하며 아버지의 삶과 결부시키고 또한 허구적인 사실을 기록했을까? 그것은 아버지의 부재 그리고 그 결핍에 대한 급부로 자신의 아버지 삶을 따라가려는 심리적 기재가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앞서 보았듯 이러한 허구적 기록은 “그가 원하는 것을 가지려고 어떤 대가도 치를 것이다 Ce qu’il désire, il l’exige à n’importe quel prix” RIMBAUD Arthur, Œuvres Complètes, Gallimard, 1972, p. X. 라고 했던 것처럼 그가 원하는 것을 위해 자신의 과거도 왜곡할 의사가 있음을 의미한다. 부연하자면, 허구적 또는 표층적인 “나(je)”는 현재의 허구적 정체성을 담보로 그가 원하는 이상적인 정체성을 어떤 식으로든 구현하겠다는 욕망 또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