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일본근대학회 일본근대학연구 일본근대학연구 제39호
발행연도
2013.1
수록면
7 - 28 (22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17세기에서 18세기는 13∼16세기에 벌어진 제국의 수축과 ‘대항해 시대’를 거친 이후의 세계사적 ‘근세제국’의 시대로 파악할 수 있다. ‘근세제국’이란 ‘보편=재지’의 이중 잣대가 기준으로 정착되어간 단계를 가리킨다. 동아시아에 있어서 이는 명조와 청조가 이념적 중화로서 존재하면서도 조선왕조, 도쿠가와 왕조, 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의 각 왕조가 정치적, 문화적으로 자립해 가는 과정으로 나타났다. 동아시아의 이념적 보편성을 체현하는 것은 유교・주자학, 그리고 중화사상이다. 이들은 명・청조나 조선왕조에서는 과거제의 채용과 함께 정치체제에 편입되었으며 사회시스템 자체에도 깊이 뿌리내린 이념으로 존재했다. 가령 중국에서는 종족제나 공동주의적, 상호부조적 시스템의 심부에 유교・주자학이 침투해있었다. 한편 동아시아 변경부에 위치한 도쿠가와 왕조는 무가의 압도적 우위에 놓인 지배기구였던바 과거제는 채용되지 않았고 유교・주자학의 영향도 일부에 그치고 말았다. 이러한 보편성이 이념으로 작용하거니와, 다른 한편 재지성이 강화되고 정치적으로는 중화제국의 영향력이 이완되어 갔던 것은 명・청조와 주변 여러 왕조의 관계에서도 엿볼 수 있다. 특히 여기에 영향을 준 것으로 명청 왕조교대라는 격동을 들 수 있다. 이전까지 중화로 여겨졌던 명조가 멸망하고 이적으로 인식되던 청조가 성립함에 따라 동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중화의 파워 헤게모니는 확실히 쇠퇴했으며, 조선왕조나 도쿠가와 왕조에서는 자국의 왕조를 중화로 여기는 자의식이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사상사적으로는 유교・주자학의 체계적 분해의 과정으로 볼 수 있으나, 분해를 겪는 와중에도 이미 방대하게 축적되어 있던 지의 집적 자체는 변함없는 지의 발신지로서의 지위를 보지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으며, 지의 표상인 한자・한문은 여전히 ‘성스러운 문자’로서 존재했다. 조선왕조와 도쿠가와 왕조는 연경사나 나가사키 무역을 통한 청조로부터의 지의 수입에 계속하여 노력하였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청조는 19세기말까지 이념적 중화로서 존재할 수 있었다. 조선왕조에서는 명청 왕조교대 이후 조선중화주의, 동화주의 등의 경향이 강해졌으며 게다가 왕조내부의 당쟁이 주자학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언뜻 보기엔 주자학적 이념이 강화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는 실태적 중화의 부재에 의한 것이었던바 중화문명권 확산에 나타난 하나의 경향으로 보아야만 한다. 변경에 위치해있던 도쿠가와 왕조에서는 고학파적 수정과 일본형 화이사상의 태두가 일부 보이긴 하지만 사회시스템 전체에 광범한 영향력을 가지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으며, 왕조의 중심 이데올로기는 오히려 ‘무위’의 강조를 거쳐 교호기에는 무단정치로 회귀하는 등, 중화문명권으로부터의 자립의 경향은 강해졌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80)

참고문헌 신청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