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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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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사학회 영국 연구 영국 연구 제30호
발행연도
2013.1
수록면
33 - 74 (4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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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8세기 잉글랜드 워크하우스의 역사를 도덕경제의 쇠퇴라는 사회경제적 변화와 연관 지어 살펴보려는 시도이다. 1601년 제정된 엘리자베스 구빈법은 두 가지 핵심 사항을 담고 있다. 첫째 이 법은 구빈을 개별 교구의 책임으로 규정했고, 둘째 구빈시설을 통한 빈민 노동을 적극 권장했다. 두 번째 사항은 이후 워크하우스의 건립으로 구체화되었다. 워크하우스는 17세기 말 존 캐리(John Carry)와 존 벨러스(John Bellers) 같은 사회개혁가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빈민들을 갱생시켜, 협동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교구와의 갈등과 재정 문제로, 끝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였다. 1723년 시행된 워크하우스 심사법은 빈민의 고용과 숙식을 위해 교구행정가들이 워크하우스를 구입하거나 임대하는 것을 합법화함으로써 워크하우스 역사의 전기를 마련했다. 이 법은 워크하우스 입소를 거부하는 빈민에게서 구빈 수혜 자격을 박탈한다고 명시했다. 교구행정가들이 노역장 운영의 중심으로 부상함에 따라 워크하우스의 목표는 구빈 비용 절감에 맞추어졌다. 이에 따라 워크하우스는 빈민 갱생이라는 기존의 목표를 잃어버리고 도제 연수를 알선하거나 고아를 돌보는 시설로 전락했다. 워크하우스 입소가 불가피해짐에 따라 빈민들의 불만은 높아져갔다. 실제로 이러한 불만은 1765년 서퍼크(Suffolk)에서 소요사태를 야기했다. 그러나 워크하우스는 더욱 더 엄혹해졌다. 결국 워크하우스는 도덕경제를 바탕으로 빈민들을 다시금 사회로 환원하는 시설에서 자본주의적 감시와 통제를 통해 수동적인 빈민노동자를 양산하는 시설로 변화하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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