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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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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사상문화학회 한국사상과 문화 한국사상과 문화 제57호
발행연도
2011.1
수록면
211 - 239 (2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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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7세기 중엽 이후 과거가 폐지된 1894년까지 270여 년 동안 문과⋅생진과⋅무과⋅천거⋅음직을 통한 관직 진출 동향을 중심으로 여흥 민문 성장의 구조를 고찰한 것으로 그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여흥 민문은 문과에 163명이 급제하였는데, 경파 73명(44.8%), 향파 90명(55.2%)으로 향파가 17명(10.4%)이 많았으나, 19세기 세도정치기에는 향파의 문과 급제율이 식년시⋅별시 모두 낮아지고, 경파인 여흥 민문의 식년시⋅별시 독점현상이 두드러져 문과에서의 ‘경(京)⋅향(鄕) 분기(分岐)’ 현상이 확연해졌다. 둘째, 여흥 민문 중에서도 인현왕후를 배출한 민유중계가 문과의 67.6%, 생진과의 48.2%, 무과의 72%, 음직의 67.3%라는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였다. 민유중계는 상층에서 멀어진 지파가 무과를 통해 관직에 적극 진출하여 훈무세가(勳武世家)를 형성하였고, 음직도 관직 진출의 새로운 경로로 적극 활용하여 19세기 중반 이후 기득권을 유지하는 메커니즘의 하나로 활용하였다. 셋째, 여흥 민문의 민시중⋅민정중⋅민유중 형제는 현종-영조대 남인인 전서공파의 민희⋅민암 형제와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민희⋅민암 형제는 현종대 예송논쟁에서 남인 영수 허목을 지지하고 송시열 처벌에 온건론을 펼치며 탁남의 입장을 지지하였으나, 경신대출척⋅갑술환국을 거치면서 서인에 패배하고 정치적으로 몰락하였다. 넷째, 여흥 민문에서는 민유중의 손자인 민익수와 민우수 형제가 유일로 천거되었다. 이들은 영조 전반기의 대표적 산림인 이재의 외종 조카로, 송시열⋅이단상⋅조성기⋅김창협⋅김창흡으로 이어지는 낙론 학맥을 계승하여, 여흥 민문이 18세기 후반 서울의 노론 낙론 산림가로서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는데 일조하였다. 다섯째, 여흥 민문은 문과⋅생진과⋅무과⋅천거⋅음직을 통하여 267명이 관직에 진출하였고, 이 중에서 100명이 당상관으로 진출하였다. 당상관 진출은 민시중계 40.4%, 민유중계 38.7%, 민정중계 28.6%로, 이는 안동 김문 청음파⋅선원파⋅휴암파의 당상관 진출 비율인 25-30%보다도 높은 수준이었다. 19세기에 해당하는 26-29세에 와서 여흥 민문 당상관이 급격히 증가하는데, 그 중에서도 민유중계의 관직 독점이 압도적이었음을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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