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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사상문화학회 한국사상과 문화 한국사상과 문화 제63호
발행연도
2012.1
수록면
301 - 327 (2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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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신라 국학 설립의 의의를 조명하고, 신라 유학의 발전상을 논구한 것이다. 신라는 삼국 가운데 가장 발전이 부진한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삼국통일을 주도하였다. 금년은 신라 국학이 설립 된지 1330년을 맞는다. 신라 국학의 설립은 682년으로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국학이 설립되는데 있어 강수, 설총, 그리고 김춘추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국학의 교육과정은 상품, 중품, 하품의 3품으로 되어 있었고, 오경이 중심이 되고 『문선』과 『산학』도 가르쳤다. 특히 『논어』와 『효경』은 공통 필수과목으로 강조되었는데, 이를 통해 충효윤리가 중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788년에는 독서삼품과가 시행되었는데, 이는 인재의 능력을 3단계로 나누어 평가하는 제도였다. 신라의 국학은 유교교육의 산실로서 유교적 인재 양성과 유교윤리의 제고에 크게 기여했다. 신라의 유교를 대표하는 유학자로는 강수, 설총, 최치원을 들 수 있다. 강수는 문장가로서 외교문서 작성에 공이 커서 신라의 통일에 기여하였다. 강수는 어려서 불교는 世外敎라 하여 좇지 않고 世間的 유교를 선택하였다. 설총은 원효의 아들로 吏讀文을 가지고 유교경전을 강의하였다. 그는 『花王誡』를 써서 임금에게 忠諫을 권장하였는데, 최초로 동국 18현에 종사되었다. 최치원은 통일신라기의 대표적인 석학으로 당나라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공부하고 벼슬까지 하고 돌아왔다. 그는 유. 불. 도에 회통하였고 『계원필경』을 남겼는데, 동국 18현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최치원은 그가 쓴 「鸞郞碑序文」에서 신라 고유사상으로서의 風流道(風月道)의 존재를 밝히고, 이것은 유. 불. 도 3교 사상을 포함한 玄妙之道라 하였다. 신라의 유교사상은 원광이 만든 ‘화랑세속5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것은 유교적 요소도 있고 불교적 요소도 없지 않지만, 신라가 처한 현실적 상황을 고려한 世俗戒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화랑들은 명산대천을 유람하며 한편 도의를 연마하고 다른 한편 歌樂으로서 樂을 즐겼으니, 예악을 겸비한 균형 잡힌 인간상을 길렀던 것이다. 또 「壬申誓記石」에는 두 화랑이 맹세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문무겸전의 화랑상을 담고 있다. 金后稷의 일화에서는 忠諫의 전통을 배울 수 있고, 「黃草嶺碑」에는 『논어』의 修己安民의 정치철학이 담겨있으며, 忠談師의 「安民歌」에는 공자의 正名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이렇게 볼 때, 신라의 삼국통일은 물론 신라 천년의 역사에서 국학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고, 또 세간교로서의 유교의 역할이 지대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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