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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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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사상문화학회 한국사상과 문화 한국사상과 문화 제69호
발행연도
2013.1
수록면
87 - 107 (2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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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대원군의 실권(失權) 후, 이른바 운양호 사건이 빌미가 되어 1876년 조선은 개항을 요구하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에 부산, 원산, 인천이 개항되었으며 국내 정치 상황은 개화 세력과 수구 세력이 맞서는 혼란스러운 정국이었고, 조선의 국운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상황으로 치달아 국권이 흔들리고 민족의 자존심이 훼손되는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때, 주시경은 1876년 황해도 봉산에서 태어나 1914년 선생의 나이 불과 39세에 안타깝게도 생을 마감할 때까지 평생을 국어 연구와 민족어 보급 및 계몽에 힘을 썼던 학자였다. 주시경은 일찍이 민족의 계몽을 위해 신학문을 배웠는데, 당시는 국어학 연구가 서양의 문법 이론의 틀에 맞추어 기술되던 시기였다. 그런데 주시경은 분명한 언어 의식과 독창적인 이론을 토대로 국어 문법을 기술한 독보적인 학자였으며, 지금도 국어학사에서 상징적인 존재로 남아 있다. 더욱이 주시경이 제시한 문법 체계가 현대 국어 문법의 이론적 틀을 마련하는 데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에서 주시경은 그 자체가 국어 연구의 시작점이며 국어 문법 연구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주시경은 1894년인 19세의 나이에 큰 뜻을 품고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1900년인 25세의 나이에 배재학당을 졸업하였는데, 배재학당 재학 5년 동안, 그는 영문법을 공부하면서 언어의 특징과 공통성을 깨우치고 언어학의 이론을 정립하면서 국어 문법의 기틀을 세워나갔다. 주시경은 배재학당을 졸업한 1900년부터 한글을 가르치는 데 더욱 박차를 가하였는데, 상동교회 청년학원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정규의 교과목으로 국어문법을 가르치면서 수많은 후학을 길러냈다. 또한, 국어 연구도 지속적으로 하였는데, 주시경의 학문은 크게 보아 문자론과 맞춤법, 음성학과 문법론, 사전 편찬의 노력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주시경의 이러한 학문적 성과는 <대한국어문법>(1906), <國語文典音學>(1908), <國語文法>(1910), <말의소리>(1914) 등의 저서에 잘 나타나 있다. 주시경은 구한말 민족의 언어와 민족의 혼을 일깨우고 평생을 우리말 연구와 보급에 힘쓴 애국 계몽운동가요 국어학자이다. 주시경의 나라 사랑과 국어 사랑의 열정은 오늘날 우리에게 교훈이 되기에 마땅하며, 우리 모두는 우리말과 우리글을 후세에 물려줄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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