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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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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사상문화학회 한국사상과 문화 한국사상과 문화 제68호
발행연도
2013.1
수록면
117 - 143 (2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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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慶雲은 曹植의 수제자인 鄭仁弘으로부터 학문을 배운 만큼 南冥學派의 일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활동을 한 인물 상당수가 조식의 제자였던 것처럼, 그 역시 의병봉기를 통해 국난극복에 힘을 보태려 하였다. 그는 의병 활동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관군에 대해서는 부정적 시각을 나타냈다. 반면 자신이 명군으로부터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명의 도움을 조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생각하였다. 이런 모습은 그가 모든 면에서 명이 조선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정경운은 명이 일본과 강화를 통해 전쟁을 마치려는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만약 강화가 이루어진다면 명 뿐 아니라 조선도 외교주체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일강화를 통한 종전을 반대했던 만큼 일본과의 국교재개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대했다. 이처럼 일본과의 대화를 부정했던 것은 華夷論에 입각하여 일본을 夷狄視하였던 조식의 일본관에 일정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경운은 전쟁 중 피난생활을 했으며, 가족 중 상당수가 전쟁 중 목숨을 잃었다. 때문인지 일본에 대해서는 강한 적대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의 군사제도와 토지제도의 우수함, 일본인의 장점 등을 인정하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은 일본의 침략이 조선인에게 일본에 대해 보다 관심을 가지게 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경운이 일본관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본의 긍정적인 면을 일부 인정했지만 일본을 낮게 평가한 전통적 일본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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