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중국 거의 모든 지역에서 “마시면 만병을 치료한다.”고 하는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농번기에 먼 거리도 마다하지 않고 “神水”를 구하기 위해 다녔으며, 그런 영검한 것이 있는 곳에 향을 피우고 기도를 드리며 무병 안위를 기원했다. 신령스러운 존재에 기대어 재액을 방지하고 무사안위, 발복을 기원하는 이런 민중들의 행위는 오랫동안 민중들의 삶 속에서 함께 해 왔으며, 심지어 중화인민공화국 건립과 동시에 전개된 중국공산당의 민간 신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도 그것은 계속 이어졌다. 본문은 1957년 중국 농촌 사회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神水” 구하기 현상과 각종 유언비어에 주목해서 그런 풍조가 나타나게 된 그 당시 사회적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1950년대 중반, 중국은 2천여 년 이상 지속되었던 개체 소유의 사유제에서 집단 소유의 공유제로의 사회주의 개조와 사회주의 국가 건설이라고 하는 중대한 사회적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농촌 사회에서 그것은 주로 농업생산합작사 건립과 국가의 양식 통제 정책으로 실천되었다. 중국공산당에 의해 진행된 이런 큰 사회경제적 개조는 원래 비교적 장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계획되었지만, 1955년 중반 이후 각종 원인으로 정치적 압박 하에서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그 결과, 1956년 집단 체제에 대한 적절한 제도 마련과 기층 간부들의 집단체제 운영 관리에 대한 경험 축적도 없이 농업, 수공업, 상공업에 대한 사회주의 개조가 완성되었다고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소규모의, 분산된 생산 자료를 조직적, 계획적으로 운영해 대대적인 생산력 향상을 가져올 것이라고 하는 기대와 달리, 농업집단화 이후 첫 소득 분배가 이루어진 1956년 하반기, 실제 농업 생산력은 늘어나지 않았고, 농민들의 실제 소득은 오히려 줄었다. 게다가 각종 재해에 대한 대처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에 있어서도 집단화 체제는 농민들의 최저 생활마저 보장해주지 못했다. 특히, 사회주의 공업화를 우선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그것에 필요한 대규모 자금을 농업 부문으로부터 조달하기 위해 취해진, 양식, 면화 등 주요 농산물을 정부가 강제로 공출하는 糧食統購統銷정책은 농민들이 더 이상 그들의 노동의 결과물인 양식에 대해 어떠한 권리도 주장할 수 없도록 했다. 사회주의 농업체제로의 전환 이후, 농촌 민중들의 삶은 더욱 고되었고, 배불리 먹을 수조차 없게 되었다. 농업 집단 체제는 그들의 삶을 보장해주지 못했다.
이와 같은 보통 농촌 민중들의 사회주의 농업 정책에 대한 불만과 장래 생활에 대한 불안은 1956년과 1957년 상반기, 국가의 사회에 대한 통제가 상대적으로 완화된 분위기 하에서 여러 형태로 표출되었다. 즉, 한편으로는 적극적으로 退社나 양식을 요구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모모 신이 곧 강림하여 세상을 구할 것이다.”, “합작사를 탈퇴하라.”, “국가에 양식을 팔지 마라.”와 같은 각종 유언비어를 만들고 전파하며 간접적으로 자신들의 불만과 의견을 표출했고, 아울러 “神水”와 같은 영검한 것을 구하러 다니며 치병과 무사안위를 기원했다.
그러나 1957년 여름 “反右派鬥爭” 사건이 발생한 이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두 계급이념에 기초한 투쟁이 다시 중국 사회의 주요 초점이 되었고, 이것은 소위 “사회주의교육”운동의 형태로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그런 정황 하에서,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하는 가운데 드러난 체제 자체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모순이나 정책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채, “反革命”、“反社會主義”、“反黨”적 ‘죄행’ 아래 모두 덮이게 되었고, 대약진시기 엄청난 인명 손실을 낳은 대기근의 싹도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