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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중국사연구 제117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55 - 79 (2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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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보전쟁은 唐 天寶9년(750)에 南詔가 당을 공격하며 발발한 전쟁이며, 전쟁은 당 변방 태수 張虔陀의 가혹한 행위로 인해 촉발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 근래에는 전쟁의 발발이유가 변방의 한 불량한 관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劍南節度使 章仇兼瓊 등 검남 인사들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천보전쟁이 발발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남조에 대한 강경책이며 이는 장구겸경ㆍ鮮于仲通 등 검남인사들이 주도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장구겸경은 안융성 탈환의 계책으로 현종을 기쁘게 하여 검남절도사에 발탁되었고, 선우중통은 남조 토벌을 원하는 현종의 의사를 실현시킬 인물로 추천받아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조를 자극한 것은 당의 對南詔 강경책이며, 당은 이를 실현시킬 인물들을 검남절도사에 임명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문제는 당이 남조에 대해 강경책을 실시한 이유이다. 당시 남조는 당에 적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강력한 토번이 이 지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당이 쉽게 대남조 강경책을 취하기는 어려웠다고 짐작된다. 그럼에도 당이 대남조 강경책을 취한 것은 토번과 남조에 대한 승리를 자신했던 까닭이다. 당시 당은 양국의 중요한 길목인 石堡城과 安戎城을 확보한 상황이었고, 이로써 군사적 우위를 확신했던 것이다. 당이 남조에게 기의한 爨蠻을 향해 군대를 파견한 시점(천보8년 10월)이 당이 석보성을 재확보(천보8년 6월)한 직후라는 사실은 이를 반증한다. 뿐만 아니라 당을 둘러싼 국제 관계가 당이 남조에 집중할 수 있게 조성되었다. 먼저 개원19년에 돌궐의 군사실력자 闕特勤이 사망하고 毗伽可汗마저 독살되고, 이후 당은 돌궐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시키고 결국 돌궐을 와해시켰다. 또 동북방의 거란과 발해에 대한 강경책도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당이 동북방의 국제 질서를 장악하게 되면서 당은 안심하고 최남단의 남조에 대해 강경책을 취하고 군사를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천보전쟁은 장건타 개인의 불법무례한 행동이나 가렴주구로 인해 촉발된 것이 아니다. 또 장구겸경ㆍ선우중통 등의 검남인사들이 주도하여 남조에 대해 지배정책을 추진한 결과라고 하기도 석연치 않다. 오히려 당이 동북방의 거란이나 발해에 대해 그러했던 것처럼 남조에 대해서도 강경한 군사정책을 취한 까닭이며, 검남절도사들은 이러한 당의 정책을 실현시키는 존재들이었고 장건타는 그 최전방에서 남조가 불만을 폭발시키는 대상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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