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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중국사연구 제82호
발행연도
2013.1
수록면
229 - 262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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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17-1923년 북경대학 총장재직시기 채원배가 정치적 동지였던 국민당, 특히 그 영수인 손문의 혁명활동을 반대했던 원인을 분석하였다. 학자인 蔡元培의 일생에서 주목할 점은 격동하는 중국 정치변동 과정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문화적 공로도 탁월하지만, 그의 정치활동을 제외한다면 그의 전체 모습을 파악하기 어렵다. ‘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실천하는 儒家적 지식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채원배는 辛亥革命 이전 同盟會에 참가, 反滿혁명 활동을 했다. 암살과 폭동을 혁명을 위한 좋은 수단으로 생각했다. 이 시기 그는 혁명가였고 孫文과는 혁명동지였다. 중화민국이 성립하자, 1912년 원세개정부의 초대 교육총장에 부임한다. 이러한 정치활동에는 직·간접적으로 손문의 영향이 있었다. 그 해에 교육총장직을 사임한 채원배는 독일로 유학을 갔고, 1913년 5월 손문의 부름으로 베를린에서 귀국, 제2혁명에 참여했다. 혁명이 실패하자 그는 가족을 데리고 프랑스로 갔다. 그리고 1916년 10월 유럽에서 北京大學 교장 직을 제의 받고 귀국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 일도 손문의 뜻을 받아들인 것으로 알고 있다. 손문 또한 채원배를 북경에 있는 자신의 정치적 대리인으로 여기고 있었고, 채원배의 북경대학 교장 취임을 지지했다. 그러나 북경대학 총장직에 부임한 채원배는 혁명의 길에 동행하지 않았다. 그는 북경대학 개혁에 전념해 대학을 쇄신시켰다. 그는 부임한 이후, 정력적으로 북경대학을 개혁하였다. 사상․ 학술자유, 兼容幷包를 기치로 신구학자를 초빙하여 북경대학을 학문의 전당으로 만들었고, 신문화운동의 터전을 마련해주었다. 손문과 달리, 평화적인 방법으로 구국의 목표를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채원배는 북경대학 총장 재임기간 동안에 여러 가지 정치문제에 있어서 손중산과 일치하지 않았다. 여러 학자들은 채원배의 일생 중, 국민당에 대한 태도가 親黨에서 反黨으로, 反黨에서 親黨으로, 또 反黨으로 이어진다면서 정치적 행동의 모순이라고 지적한다. 그 지적에 의하면, 북경대학 교장에 재직하던 1917년-1923년은 반당의 시기가 된다. 그러나 초점을 그의 이념인 敎育救國에 맞춘다면, 모순이 아니라 교육구국을 목적으로 한 일관된 행동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1917-1923시기는 채원배의 입장에서 보면 북경대학 교장재임 시기였고, 중국현대사의 동력인 신문화운동, 5 4운동, 중국공산당의 창당이 있었던 시기였다. 손문 측에서 보면, 국공합작 직전이었다. 두 거목 사이의 갈등은, 오사운동이후 중국이 채택해야하는 로선에 대한 선택 때문에 빚어진 갈등이었다. 부인할 수없는 사실은 그들은 구국이라는 면에서 일치했다. 그러나 손문은 직업혁명가이고 국민혁명을 통해서 진정한 부르주아 민주공화국을 건립하고자 했고, 군사적 힘, 혁명을 통해서 그 구국목표를 실현하고자 했다. 죽을 때에도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동지들은 여전히 노력해야 된다.’고 국민당원들을 각성시켰다. 반면 채원배는 북경대학 교장재임 시기 사상문화의 혁명으로 중국사회를 변혁하고자 했다. 그 방법은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다. 양자의 갈등은 우선 대독참전에서 드러났다. 채원배 등 민주주의 자유주의 인사들은 북경정부를 지지하여 참전을 주장하고 남북화해를 촉구했다. 반면 손문은 북경정부를 용인하지 않았다. 따라서 북경정부를 지지하여 참전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용인할 수 없었다. 두 번째 갈등은 ‘護法’정부에 대한 인식이었다. 손문이 남방에서 ‘護法’의 기치를 올린 이후, 중국은 남북 분립 상태가 되었다. 채원배는 사람들의 인식상 南人이었다. 그러나 채원배 민국 후의 북경정부 관료를 역임했다. 또 그가 북경대학 교장에 부임한 것은 손문의 ‘護法’ 전이었다. 채원배의 인식에 惡정부이지만, 민국의 중앙정부는 북경에 있는 정부였다. 남방 호법정부의 성립으로 채원배의 입장은 미묘하긴 했지만, 손문에 의한 호법정부의 성립으로 중국이 더욱 혼란해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남방정부의 정책에 확실히 반대했다. 채원배와 손문은 인식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에, 누구도 상대방을 설득하지 못하고, 자신이 옳다는 길을 각자 갔다. 채원배는1917-1923년 북경대학 재임 시기 호적 등의 자유주의자들과 북경대학 동료로서 사상문화 교육에서 호홉을 함께 했다. 채원배는 그들에게 신임받고 추앙되었다. 채원배를 서구식 자유주의자라고 지칭할 수는 없지만, 이 시기는 중국의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胡適과 행동이 일치했다. 학자로서 학술자유 사상자유를 주장하고 자유주의적 경향을 보였다.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무력통일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또 교육과 실업 과학을 진작시켜 평화적으로 구국을 도모하려 했고, 민주정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그는 격렬한 계급투쟁이나 사회혁명을 반대했다. 그런데 이시기 손문은 군벌의 힘에 의지하여 무력으로 정국을 장악하려 했고, 북경의 군벌과 대치하고, 남방 군벌 사이에서 각축하고 있었다.. 그래서 채원배의 명의로 재차 ‘護法의 일을 끝내고, 국민의 자격으로 함께 국사를 위해 진력하도록’ 그의 햐야를 촉구했다. 손문 주위의 국민당 인사들의 맹열한 비난을 받으면서 채원배는 자신이 옳다는 길을 갔다. 그것은 교육구국의 길이다. 채원배는 1923년 북경대학 교장 직을 사임하고 출국하여 1926년까지 해외에 있었고, 그 사이 1925년 손중산이 서거 했기 때문에, 채원배의 손문에 대한 정치방면의 갈등은 끝났다. 학자들은 채원배의 정치생애 중에서 1920년대는 모순으로 가득 차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것은 현상만을 보고 단정한 것이다. 그는 그의 사상 기조에는 교육구국이 흐른다. 정치적인 행위가 어느 때는 反孫文(1920년대 초기), 어느 때는 親黨(1927청공과,1928년 남경국민정부참여),어느 때는 반당(1932년 민권보장동맹참여)으로 표현되지만, 그 사상 기저에는 변함없는 원칙, 일관된 입장-교육구국‧ 인재양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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