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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중국사연구 제73호
발행연도
2011.1
수록면
227 - 259 (3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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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시통지관 인사들은 줄곧 권력에 저항적인 입장을 유지해온 비판적 지식인이었다. 柳亞子, 朱少屛 등은 辛亥革命 이전 南社를 조직하는 등 혁명파로서 청조에 저항했으며 당시 국민당원으로서도 장개석의 독재체제에 반발해왔다. 또한 徐蔚南, 胡懷琛 등도 新南社 등을 통해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활동해왔다. 1932년 7월 상해시통지관이 성립했을 때도 이들은 대체로 국민정부 하 상해시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으면서도, 그것과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이 점에서 상해시통지관의 조직과 활동은 비판적 지식인들이 그 비판의식을 유지하면서 지역 연구자로서의 전문가 집단으로 자리 잡는 과정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이들은 시통지의 편집 사업에 종사하는 과정에서 상해 연구를 업으로 삼는 전문가 집단으로서 자리를 잡아갔다. 관장 유아자가 회고하는 것처럼 편집부 인사들은 이 사업에 참여하면서 상해 연구를 “필생의 사업”으로 삼는 데 뜻을 모았다. 통지관을 통해 이들이 받는 급료는 비록 큰 돈을 벌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들이 연구를 업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데는 충분한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상해 연구자로서 자기 자리를 찾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上海通叢書”를 선전하면서 “상해 연구의 권위자”라는 광고 문구를 내세우고 있는 것처럼, 이들은 비판적 지식인에서 전문 연구자로서의 자기 영역을 형성해가고 있었다. 이때 이들의 연구 시각에는 그들의 비판 의식이 투영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중국인으로서 민족, 국가 의식이 강하게 견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당시 상해는 중국인 거주지역(華界)과 공공조계, 프랑스조계로 분리된 도시공간의 구조 요컨대 이른바 “三界分治”의 구조 하에 놓여 있었다. 시통지의 「연혁」, 「공공조계」, 「법조계」 항목은 기본적으로 이 각각의 도시공간의 역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들은 이러한 도시 상해의 공간적 분리 상황을 기본적으로 인식하면서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그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프랑스조계 항목을 편집할 때 유아자는 동추의 원고에서 식민주의적 입장을 배제하기 위해서 꼼꼼히 원고를 교정했다. 그들은 식민주의뿐만 아니라 봉건 세력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통지관 인사들이 주로 활동하던 공간이 프랑스조계였다는 점은 흥미롭다. 주비위원회는 구현성 지역에 위치했지만, 정식 성립한 시통지관은 프랑스조계에 자리를 잡았다. 또한 유아자, 호회침(호도정) 등 주요 편집 인원들은 프랑스조계의 가까운 거리에 거주하면서 활동했다. 이는 이들이 식민주의뿐만 아니라 중국 권력의 봉건 세력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려고 노력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이들의 편찬 작업은 이 지역의 여러 권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시통지관의 편찬 작업에 대해 공공조계의 공부국, 프랑스조계의 공동국, 국민당의 상해시정부는 모두 적극적으로 자료 제공 협조를 하지 았다. 영국, 프랑스 쪽에서는 자료를 제공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시정부 역시 유아자가 이끄는 시통지관에 대해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통지 편찬을 위한 자료를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도서관, 헌책방 등을 뒤져 수집해야 했다. 이런 가운데 이들이 지역 연구의 전문가 집단으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지역 자료의 수집, 정리에 분투했던 것은 매우 주목되는 사실이다. 상해시통지관이 짧은 기간에 높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데는, 이들이 이 연구 사업을 그들에게 주어진 과제로가 아니라 자신들이 해야 하는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업무 시간 외에도 주도적으로 그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상해통사의 조직과 그 사원으로서의 활동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胡道靜, 吳靜山은 시통지관의 자료 수집, 정리에 매우 큰 역할을 했는데, 이들은 업무 시간 외에 도서관, 가판, 고서점 등을 뒤지면서 적극적으로 자료를 수집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수년 간 가판을 돌아다니면서 수공업공회, 상업공회 및 동향회 조직들이 신문에 발표하는 “徵信錄”을 수집해 󰡔通志館館藏徵信錄書目󰡕으로 정리 출간하기도 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일본의 東亞同文書院과 상호 자료교환 협력을 전개하기도 했다. 또한 1935년 11월에는 외국인이 개최한 老上海展覽會에 상해사 관련 자료를 제공한 인사들을 알아내 개별 접촉을 통해 그 자료들을 확보하기도 했다. 또한 호도정은 대외 개방하지 않는 徐家滙 耶穌會修士院 내의 天主堂藏書樓에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접근해 1년 여 동안 그 소장 자료를 파악하는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들이 당시 시점에서 확보할 수 있는 자료들을 망라하기 위해서 노력을 경주했던 것은, 상해 연구의 출발로서 매우 주목되는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상해시통지관 역시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이들에게 전문가로서의 전문성을 보다 제고하고 학문적 깊이를 높일 수 있는 더 이상의 여유는 주어지지 못했다. 그들은 항일전쟁, 사회주의 혁명 등 급박한 시대적 흐름에 적응해야 했다. 󰡔통지󰡕 편찬은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속에서 이들은 상해 연구의 성과들을 축적하고 그것을 이론, 방법론 등 면에서 심화해가는 과정을 더 이상 진행하지 못했다. 어찌보면 이는 중국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시대적 한계라고 볼 수 있는 바, 개혁개방 이후 상해사 연구에서 국민국가로서 반제 또는 大國으로의 성장 과제와 연결해 거시적 담론으로 ‘조급하게’ 결론을 맺어가는 경향이 없지 않다고 할 때, 상해시통지관의 사례는 이 도시에 대해 더 많은 미시적인 관찰과 분석을 축적해야 하는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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