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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중국사연구 제51호
발행연도
2007.1
수록면
107 - 118 (1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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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國 雍城地區의 六國文化와 移民 柏 倉 伸 哉 문헌에 따르면 秦의 사민정책은 戰國 후기, 함양 천도 후인 혜문왕기 이후에 활발하게 이뤄졌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사민이 시행되지 않았던 것일까. 또 함양 이외의 지역, 예컨대 秦國 내부의 雍城에서는 어떤 상황이었었을까. 필자는 이미 秦으로부터 河南省 三門峽 지역으로의 徙民을, 頭向과 葬法을 통해 식별하고 그 상황에 대해 고찰했다.史記 秦本紀․始皇本紀 등에는 秦國에서 六國으로의, 또는 六國에서 함양으로의 사민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지만, 雍城지구로의 사민 가능성은 유감스럽게도 문헌을 통해서 추측될 수 없었다. 본고는 秦國의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던 雍城지구에 六國 주민이 존재했음을 논급해 보려 한다. 전체적인 頭向 변천을 개관해 보면 춘추 후기 또는 전국 전기에는 西向이 압도적이다. 다만,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우위성에는 변함이 없으면서도 西向 비율이 낮아져 간다. 전국 중기 경부터 北方과 東方을 모범 頭位로 하는 집단의 존재가 인정되며, 이후 시간의 경과와 함께 비율은 증대되어 간다. 八旗屯, 西村秦墓는 전통적인 秦墓이지만, 이러한 집단에서도 약간씩이기는 하지만 외래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은 자, 또는 이주민의 그림자가 발견된다. 頭向 변화만을 본다면 세 墓群이 같은 경향을 보이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高莊秦墓에서는 直肢葬墓의 비율에서 특이점을 보인다다. 八旗屯, 西村秦墓의 直肢葬墓 비율이 매우 낮다. 그렇다면 八旗屯, 西村秦墓와 高莊秦墓의 이민 집단의 차이는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八旗屯과 高莊은 같은 계열의 묘군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되며, 그 차이는 주로 조성된 시대에 있다. 八旗屯에 直肢葬墓가 적은 것은 그러한 문화의 영향과 집단이 거의 유입되지 않았던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西村은 秦公陵園의 守人과 부속인의 墓群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보수성이 강한 집단의 묘군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八旗屯, 西村, 高莊의 각 묘군에도 미묘한 차이가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된다. 왜 이런 중요한 도시에도 이민이 행해졌던 것일까? 商君書 徠民篇에는 원래의 秦人으로 병사를 삼고, 새로 점령된 땅의 백성을 농업에 종사하게 한다면 병사들이 국외에 오랫동안 머물러도 나라 안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니 富强을 동시에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국 중기 孝公期 상앙의 변법 이후, 진은 秦은 급격히 영토를 확대해 갔다. 이러한 전비 체제 아래서는 秦人의 다수가 從軍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로 인한 노동력 부족을 매우기 위해 점령지 등으로부터 徙民이 이뤄졌을 것이다. 西村秦墓에서 알 수 있듯이 단순 노동력으로서의 외래민은 계층적으로 낮은 위치에 처해 있었다고 생각된다. 한편, 高莊秦墓에서처럼 청동예기를 부장하는 묘주는 망명한 귀족층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렇듯 秦國 내부, 더구나 제사와 역대 왕릉묘가 존재하는 보수적인 雍城에서조차도 전국 중기부터 동방문화와 이민의 영향이 확인된다. 始皇帝는 始皇 26년 함양에 대규모의 사민을 시행했는데, 이러한 외부로부터의 徙民은 아마도 전국 중기 즈음부터 맹아를 찾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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