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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중국사연구 제84호
발행연도
2013.1
수록면
1 - 32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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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戰國時代 列國 간의 交質 행위 중 列國에서 秦에 入質한 사례를 중심으로 검토하였다. 연구의 초점은 이러한 交質 행위가 실제 외교 관계에서 효과가 있었는가에 두었고, 列國의 秦 入質 사례를 통해 이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하여 확인된 사실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戰國時代 列國에서 秦으로 入質한 사례와 그 배경을 살펴보았다. 列國에서 秦으로 入質한 사례는 모두 일곱 차례 확인되고, 入質한 質子의 신분은 모두 出質國 宗室의 일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趙公子 郚를 제외하고 모두 太子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太子’는 ‘일국의 차기 왕위계승권자’이다. 실제로 秦에 入質한 韓太子 倉은 후에 韓襄王, 楚太子 橫은 후에 楚頃襄王, 楚太子 完은 후에 楚考烈王, 魏太子 增은 후에 魏景湣王 󰡔史記󰡕 44 「魏世家」, “(爲安釐王)三十四年安釐王卒 太子增立 是爲景湣王.”으로 즉위하였다. 이렇듯 列國의 太子가 秦에 入質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秦 入質을 통해 해결하여야 할 현안이 막중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表 1>의 講和ㆍ구원병 요청 등이 그것이었다. 기원전 314年, 秦의 침략을 받은 韓이 秦과 講和하기 위해 秦에 입질한 韓太子 倉, 기원전 303年, 韓ㆍ魏ㆍ齊 3國의 침략을 받은 楚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구원병을 요청하는 대가로 秦에 入質시킨 楚太子 橫, 기원전 272年, 거듭된 秦의 공세를 이기지 못한 楚가 講和의 조건으로 秦에 入質시킨 楚太子 完 등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러나 천하가 모두 秦에 귀의한 기원전 254年(秦昭襄王 53年)을 기점으로 列國의 秦 入質은 그 배경이 당면한 ‘현안 해결’에서 ‘出質國의 평화 보장’으로 조건이 바뀌었다. 즉, 弱小國이 强大國인 秦에 太子를 入質시켜 평화를 보장받으려 했다. 이것은 ‘볼모’의 성격이 강하였다. 魏安釐王시기 秦에 입질한 魏太子 增, 趙悼襄王시기 秦에 入質한 趙太子, 燕王喜시기 秦에 入質한 燕太子 丹 등이 모두 이 경우에 해당하였다. 다음으로, 戰國時代 列國에서 秦으로 入質한 사례가 실제로 어느 정도 외교적 효과가 있었는지를 검토하였다. 戰國時代 列國은 兼倂戰을 수행하였고, 격변하던 정세를 해결하기 위해 君主 간의 회합, 合縱ㆍ連橫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외교 활동을 하였다. 이를 통해 다양한 형태의 군사 동맹이 결성되었다. 秦과 列國 간의 交質 행위를 통해서도 다양한 형태의 군사 동맹이 체결되었다. 기원전 314年, 韓太子 倉의 秦 入質로 이루어진 秦ㆍ韓 군사 동맹, 기원전 272年 楚太子 完의 秦 入質로 이루어진 秦․楚 군사 동맹 등이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특히 이러한 交質을 통한 군사 동맹은 쌍방 간의 신뢰를 담보로 하였다. 기원전 314年. 韓太子 倉이 秦에 入質하는 조건으로 秦ㆍ韓 양국은 군사 동맹을 맺었다. 韓은 이 동맹으로 秦의 군사적 압박을 피할 수 있었고, 秦은 남방의 대국 楚를 정벌할 때 동맹국 韓의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기원전 272年, 楚太子 完의 秦 入質로 이루어진 秦․楚 군사 동맹으로, 秦은 楚를 공격하던 군대를 三晋으로 돌릴 수 있었고, 楚는 秦의 공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외에 秦에 入質한 魏ㆍ趙ㆍ燕 등의 국가도 質子의 秦 入質 당시에는 秦과 우호적인 동맹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韓太子 倉의 入質로서 형성되었던 기원전 314년의 秦ㆍ韓의 동맹 관계는 강대국인 秦의 일방적인 동맹 파기로 끝났다. 마찬가지로 楚ㆍ魏ㆍ趙ㆍ燕 등의 국가가 秦과 맺었던 우호 동맹 혹은 군사 동맹은 강대국인 秦에 의해 간단하게 파기되었다. 특히, 戰國 말기 秦은 6國 兼倂과정에서 魏太子 增과 趙太子 등이 秦에 入質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들 국가들을 겸병하여, 이러한 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戰國時代 列國은 講和ㆍ구원병 요청ㆍ평화 담보 등의 조건으로 秦에 入質하였다. 즉, 列國은 당면한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자국의 차기 왕위계승권자인 太子를 주로 秦에 入質시켰다. 이것은 列國이 秦과의 분쟁을 피하기 위해 ‘秦 入質’이라는 평화적인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당시 列國은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合縱ㆍ連橫의 다양한 형태의 외교 활동을 하였고, 이 과정에서 質子들은 이러한 외교 활동의 중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주로 우호 군사 동맹이나 평화 담보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質子의 존재는 兼倂戰을 위시한 힘의 논리가 지배한 戰國時代 외교 관계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의 수단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戰國 중기 이후, 秦과 列國 간의 交質 행위는 대부분 강대국인 秦을 중심으로 한 외교 관계였고, 비록 이러한 交質 행위가 일시적으로 평화를 담보할 수 있었으나, 秦의 이해관계에 의한 언제든지 파기될 수 있었다. 이것은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秦과의 交質에서 列國의 秦 入質이 가지고 있던 외교적 한계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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