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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중국사연구 제84호
발행연도
2013.1
수록면
81 - 110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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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宋 초기부터 宋 皇帝는 많게는 200명-300명에 달하는 高麗使節을 上京시켜 궁전에서 친히 접견했다. 특히 神宗 皇帝는 入貢儀禮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 있어서, 다른 外國使節보다 高麗使節을 특별히 예우했다. 예를 들어 高麗使節이 港口에서 首都로 왕복할 때라든지, 首都의 同文館에 체재할 때, 그리고 回賜品 등에서 많은 예우를 하였다. 北宋王朝는 북쪽으로는 거란, 서북쪽으로는 西夏, 서남쪽으로는 交趾와 군사적으로 대립하면서 외압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北宋은 高麗를 友邦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神宗 皇帝는 高麗의 마음을 사고자 접근하여, 宋에 왔던 高麗使節에 대해 최대한의 예우를 하였다. 이에 거란은 宋과 高麗가 협공을 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高麗 쪽에 새로이 군사력을 배치하였다. 그에 따라 宋朝는 거란의 군사력을 분산시키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明朝의 경우도 北으로는 北元, 南으로는 베트남이나 왜구를 경계하기 위해, 朝鮮을 友邦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그에 따라 北宋의 前例를 참고하여 朝鮮使節을 특별히 예우했고, 淸朝 역시도 그 같은 태도를 계승한 것으로 판단된다. 동아시아 국가 가운데 朝鮮은 비교적 中國에 충실히 朝貢했다. 중국에 朝貢했던 나라들은 많았지만, 주변국이 스스로 중국에 조공해 오기를 바라는 朝貢體制의 이상에 맞춘 나라는 朝鮮이 거의 유일했다고 여겨진다. 물론 여기에는 朝鮮의 외교적 목적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된 것은 中國이 北宋 이래 淸朝에 이르기까지, 中國王朝가 자국의 외교적 목적을 위해, 우리나라의 사절에 대해서 장기적이고도 집중적인 예우 노력을 행한 결과였을 가능성도 있다. 宋朝 이래 淸朝에 이르기까지, 中國王朝는 우리나라의 使節에 대해서 극진히 예우하였다. 한번에 200-300명에 달하는 使節團을 上京시키고, 皇帝가 이들을 접견하였다는 사실은 대수롭지 않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延人員을 따진다면 高麗나 朝鮮의 상층부에 적지 않은 수의 親中人士를 양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써 중국은 자국의 울타리를 튼튼히 했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나라로 하여금 중국의 문화나 문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에 상당한 작용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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