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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중국사연구 제75호
발행연도
2011.1
수록면
197 - 230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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顧頡剛과 손진태 두 사람은 20세기 전반기 중국과 한국 두 나라의 굴곡된 역사에 노출되어 있으면서 그에 고민하던 지식인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던 인물들이다. 두 사람 모두 민속학과 역사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문화와 역사에 대한 기억을 다양한 방법과 인식으로 재구성하고자 하였다. 먼저 과학에 대한 인식과 관련하여, 顧頡剛은 전통 시대 경학의 자리를 ‘민주’와 함께 ‘과학’이 대신하였던 시대분위기 속에서 古史가 故事에 지나지 않음을 ‘과학적 방법’을 통해 강조하면서 학문의 영역에서 경학의 우상을 타파해야 한다는 구호 아래 각종 자료들을 분석․분류․비교해서 인과관계를 끌어내어 귀납하는 歷史演進의 방법을 주장하였다. 손진태의 경우 ‘조선’의 현존하는 민속문화를 인류학적 재료로 활용하여 조선상고사 연구를 시도하면서 민족의 문화요소가 인종들의 이동과 문화전파에 따라서 발달한다는 인류학적 인식을 기초로 하여 역사적 문헌자료와 답사자료를 결합하여 특히 비교라는 방법을 운용하였다. 그러나 顧頡剛이 초기 그의 학문 활동이 가설의 설정과 증거에 따라 ‘求眞’을 지향하는 역사학적 방법론의 특징을 강하게 갖는 반면, 손진태는 그의 자료 운용이 사료분석과 역사적 검증을 진행하는 방식이 아니라 민속 소재와 관련된 주제를 인용하여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방식 때문에 역사민속학적 연구방법론이라 단정 짓기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민족에 대한 인식과 관련하여 顧頡剛이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疑古 속의 一元論적 민족의 부정과 이후 救國을 위한 문화민족으로서의 중화민족의 발견으로 발전한다고 본다면, 손진태의 경우는 해방 전 인류학적 안목으로 민족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으로부터 해방 후 신민족주의사관에 의한 민족의 발견으로 발전한다. 顧頡剛은 초기에 의고적 관점으로 경학적 가치관으로 조작된 계보에 등장하는 다양한 집단을 모두 중국 민족으로 인식하는 다민족 구도를 전제하면서도 한족을 중심으로 비한족이 동화되어 간다는 인식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1931년 이후가 되면 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중화민족 외래설을 부정하면서, 중국 영토 내에서 활동하는 한족과 비한족간의 혈통의 차이를 문제 삼지 않고 문화의 동일함만을 강조하는 문화민족으로서의 중화민족을 내세웠다. 손진태의 경우, 1920년대 민족의 기원과 관련하여 단군시조론에 대하여 “전설을 통해 애국정신을 고취하는 시대착오적인 주장”이라는 비판적 자세를 가지고 있었고, 1939년의 단군에 대한 논의에서도 단군신화를 둘러싼 일제 식민지주의와 조선 민족주의의 첨예한 역사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굴절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지엽적인 시비만을 따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해방 이후 손진태가 소위 신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하여 서술한 글들을 보면 이전과는 다른 주장들이 보인다. 민족의 혼혈성을 강조했던 해방 전과는 달리 이민족의 혼혈을 극소수라고 하면서 민족의 단결력, 민족적 친밀감 등을 주장하고, 민족의 우위성을 강조하는 변화를 보인다. 민중에 대한 두 사람의 초기 인식은 모호한 점이 적지 않았다. 顧頡剛은 古史를 연구하면서 전통적인 문헌자료와 함께 민간의 전설과 故事의 演化에 주의하였지만 이는 신성불가침의 古史계통을 민간의 자료를 이용하여 보통의 역사사실로 인식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후 “민중의 입장에서 민중을 인식해야 한다[要站在民衆的立場上來認識民衆]”는 전제를 가지고, 귀족중심의 역사, 聖賢문화로 고정된 생활방식의 역사를 타파하고 민중의 역사를 발견하자는 주장에 이르고, 더 나아가 통속간행물을 통한 역사지식의 보급 등 보다 적극적인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손진태의 경우, 일제 치하에서 ‘조선’의 上古문화를 탐구하면서 그 대상을 ‘민간’ 신앙, ‘민간’ 설화 등으로 부르면서도 민중 문화라고 호칭하지 않았다. 손진태가 인류학적 관점으로 발견하고자 했던 것은 ‘민중’이 아니라 ‘土俗’을 지니고 있던 미개한 유풍을 가지고 있는 土民들이었다. 따라서 당시 좌우 지식인들의 관심사였던 민중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좁은 의미의 인류학을 벗어난 손진태는 민족을 농민과 商工漁民 및 奴隸 등 피지배계급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민족문화는 민중의 문화라고 하여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그들의 가치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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