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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중국사연구 제75호
발행연도
2011.1
수록면
113 - 141 (2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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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는 바와 같이, 경연제도는 황실 교육과 정사협의의 유교적 공론장(confucian public forum)이라는 주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명대 경연제도는 주원장이 시작한 경사 강론을 원형으로 마침내 정통연간에 제도로 정착되었다. 그런데 각 시기의 경연제도의 운영은 황제독재체제의 구축과 내각제의 운영 추이, 국정과제와 주요 현안 문제, ‘廷議’의 설립과 공론정치의 등장 등 당시의 중앙정치조직과 정국운영의 변화에 따라 그 시행 여부와 내용뿐만 아니라, 그 목적과 기능 또한 상이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즉 홍무․영락연간의 경사 강론은 유교적 통치이념을 실천하는 중요한 상징이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그 운영 면에서는 황제가 주도함으로써 황제독재체제의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한편, 수성기인 선덕연간의 경사 강론은 내각제의 정립과 더불어 내각에 의한 輔政體制가 구축됨에 따라, 군신 간의 정사협의가 그 어느 때보다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정사협의의 대상이 내각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언로에만 국한됨으로써, 君臣共治에 의한 皇權 견제는 일정 정도 제한적이거나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명대의 내각제도는 황제 개인의 정치․문학적 자문기구에 불과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황제독재체제는 이들 내각과 사례감등 두 축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설사 내각의 ‘參預機務’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내각은 어디까지나 皇權의 보조적 수단일 뿐이어서 皇權과 臣權의 균형에 의한 ‘君臣共治’의 ‘公天下’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특히 정통연간 이후에는 어린 황제의 등극과 황제의 정사 소홀, 특히 환관세력의 발호와 내각 수보제 등 기형적인 정국운영과 북방 변경지역의 불안, 빈번한 자연재해와 사회․경제적 혼란 등 불안한 정국과 봉건체제가 동요되는 가운데, 경연은 제도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의례적인 형태로만 간헐적으로 시행됨으로써 점차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이는 곧 유교적 통치이념이 실제로는 동요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명 중기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사대부 중심의 공론을 반영하는 정치적 공론장으로까지 발전시키지 못함에 따라 시대의 변화상에 부응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이렇듯 유교주의 통치이념에 입각한 정사협의의 실현과 이에 의한 君臣共治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명대 경연제도는 단지 교육기능으로만 그 명맥을 유지할 뿐이고 군신 간의 정사협의, 즉 유교적 공론장(Confucian public forum)으로서의 기능은 제대로 달성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황제의 사적 권력, 즉 ‘家天下’는 어디까지나 성학교육을 통한 수양이라는 황제 개인의 자율성에만 의존하는 형태로 제약될 뿐이었다. 이렇듯 군주권에 대한 견제장치가 제대로 작동되지 못한 상황에서 황제 권력의 자의성에 의존하는 군주권의 독주는 명대 정치사의 특징이자 명 왕조 멸망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런 점에서 명대 경연제도는 군주의 교육기능 뿐만 아니라, 특히 군신 간의 정치적 공론장으로서 경연이 이상적으로 시행되고 있었던 조선시대의 경연제도와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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