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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중국사연구 제50호
발행연도
2007.1
수록면
125 - 158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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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사의 난 중에 遼西의 평로 번진이 안록산을 이반할 때 이정기도 함께 가담하여 당조로부터 관직을 받았다. 얼마 후 당조가 평로를 통해 발해에 원군을 요청하였는데, 그때 이정기는 평로의 유력 군장이 되어 있었다. 그러면서 발해에 관해 얻은 지식은 훗날 그가 직접 발해와 교섭을 행하는 데 일정한 작용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정기 일가와 발해의 관계는 그들과 당조의 관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과 당조의 관계를 가장 잘 알게 하는 것은 이정기의 아들 이납의 齊 건국과 이후의 태도이다. 이납은 덕종과 투쟁을 벌이다가 다른 몇 개의 强藩과 함께 건중 3년(782) 11월에 齊王을 칭하였다. 이른바 ‘4왕의 난’이다. 다음 달에 회서의 이희열도 왕을 칭하고, 다음 해 10월에는 주체가 涇原軍의 옹립으로 장안에서 황제를 칭하였다. 稱帝는 당조의 완전 부정을 의미한다. 궁지에 몰린 덕종은 마침내 완패를 선언하고 4왕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4왕은 바로 표를 올려 王號를 철회하였다. 같은 달에 칭제한 이희열과 주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 패망하였다. 이러한 것을 통해 이정기 일가는 결코 독립국을 지향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조가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한 당조와의 공존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이정기 일가가 산동을 지배하던 시기에 발해와 당조는 빈번한 교류를 하였다. 그때 양자의 교량 역할을 한 것이 이정기 일가였다. 이정기 일가가 겸직한 押新羅渤海兩蕃使는 요서의 평로절도가가 겸직하였던 押兩蕃渤海黑水四府經略使에서 분화․변화된 것이다. 안록산을 이반한 평로 번진이 발해에 원군을 요청할 때 이 관직을 이용한 것이 확인된다. 발해와 당조가 사신을 교환하면 이정기 일가는 압신라발해양번사의 직무를 잘 수행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당조와 불필요한 분쟁을 야기하길 원하지 않았고 사신의 왕래가 오히려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산동지역은 이정기 일가의 보호 하에 교역이 활발하게 행해졌다. 남해의 박래품도 대량으로 유입되었다. 발해․신라의 사행 교역도 산동의 교역 발전에 공헌하였는데, 횟수는 발해가 더 많았다. 이런 점에서 발해는 신라보다 이정기 일가에게 더 유익한 존재였다. 이정기 일가는 발해와 직접 교역을 행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정기의 발해 명마 수입은 유명하다. 그 대가로서 이정기 일가는 양주를 통해 들어온 남해 박래품을 잘 이용하였다. 물론 이정기 일가는 신라와도 직접 교역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신라에는 발해의 명마처럼 이정기 일가에게 절실한 것이 얼마나 있었는지 미지수이다. 이런 점에서도 이정기 일가는 신라보다 발해와 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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