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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온지학회 온지논총 온지논총 제37호
발행연도
2013.1
수록면
153 - 188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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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복은 1693년 울릉도에서 어렵을 하다 일본인을 만나 충돌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울릉도에서 독점적인 어렵을 하여야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어렵을 하고 있었던 조선인을 자주 만나자, 어획량이 줄어든 것을 불안해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조선인이 울릉도에서 어렵을 다시는 하지 못하도록 돗토리 번주가 조치를 취해주기를 원하여서, 안용복 일행 중에서 안용복과 다른 한 명을 납치하였다. 이렇게 시작되는 안용복의 납치사건은 그 후 朝ㆍ日 양국의 울릉도ㆍ독도에 관한 영토 문제로까지 번지게 되어 ‘竹島一件’으로 마무리되었다. 최근 한ㆍ일간 독도에 관한 영토문제가 주목받으면서 안용복의 사건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는 가운데, 일본은 1693년 안용복이 납치되었을 때, 나가사키 봉행소와 쓰시마번에서의 진술이 위증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에도시대 쓰시마번사가 쓴 『竹島紀事』에 있는 안용복의 진술을 통해 그의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인식을 살펴보았다. 『竹島紀事』와 조선의 사료 등을 통해 살펴본 결과, 안용복은 일본인과 울릉도에서 만나기 이전에도 동해의 항로를 잘 알고 있었다. 동해에 있는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인식은 6세기 우산국 때부터 시작되어 고려에서 조선의 안용복에게로 이어지고 있었다. 또한, 그의 나가사키 봉행소의 진술에서는 울릉도의 방향을 말하지 않았지만, 쓰시마번의 진술에서는 방향을 동쪽이라고 했다. 이 사실은 울릉도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위증하지도 않았다는 증거이다. 따라서 울릉도에서 어렵을 하였던 안용복이 독도를 인식하지 못했다고 하는 기존의 견해는 타당하지 못하다. 안용복은 울릉도와 독도의 존재를 인식하며 어렵을 하였던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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