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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동양철학연구회 동양철학연구 동양철학연구 제75호
발행연도
2013.1
수록면
225 - 258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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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혼례를 반 겐넵의 ‘分離’―‘轉移’―‘統合’이라는 세 단계의 통과의례에 적용한다면, 親迎禮 직전의 ‘醮禮’를 (신부는 醮禮 혹은 ‘筓禮’를) ‘분리단계’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전이단계’는 ‘大禮’부터 ‘三月廟見’ 때까지로, 이 기간 동안 신랑과 그 가족들은 신부를, 신부는 신랑을 반려자로서의 자질에 대해 평가하고 시험하게 된다. 새로운 지위로 완전히 이동하게 되는 ‘통합단계’는 ‘삼월묘현’ 의식의 이행과 아울러, 신부가 타고 온 車馬를 친정으로 돌려보내는 ‘反馬之禮’가 될 것이다. 본고에서는 우리의 傳統婚禮에 관한 風俗的·思想的 고찰을 통해, 현대인들의 문화 의식과 조화될 수 있는 傳統婚禮像의 代案을 궁구해 보았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가장 특징적인 혼속으로는 壻留婦家婚을 들 수 있으며, 부여·고구려를 포함한 고대 국가의 보편적인 혼속으로 男歸女家인 壻屋制와, 女歸男家인 兄死娶嫂制가 병존했다. 아울러 고대 전적들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 당시에 ‘媒妁에 의한 議婚’ 및 ‘納幣’ 등의 혼례제도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대체적으로 親家와 外家를 포함한 近親婚의 婚俗이 濊族을 제외한 고대국가 전체에 만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高麗代까지 이어진다. 조선 건국 후 朱子式의 혼례제도인 四禮가 본격적으로 시행되었고, 구한말까지 우리의 禮俗으로 정착되지만, 親迎制 만큼은 ‘半親迎’으로 절충되어 시행되었을 뿐, 뿌리 깊은 男歸女家 婚俗으로 인해 조선말에 이르기까지 禮俗으로 흡수되지 못하였다. 조선중기의 禮學 발달을 주도했던 󰡔家禮輯覽󰡕·󰡔四禮便覽󰡕 등은 물론 조선말의 󰡔增補四禮便覽󰡕은 親迎의 기록에 관한한 時俗에 충실했다고 볼 수 없다. 󰡔儀禮󰡕 「士昏禮」에는 先秦儒家와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上下倫理 및 男尊女卑思想이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前漢의 董仲舒에 이르러 儒家는 法家의 이론을 흡수하여 三綱의 윤리체계를 수립하였고, 󰡔朱子家禮󰡕가 성립된 宋代에 오면 개인의 도덕규범을 더욱 강조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유교는 사실상 이 시대에 도태될 수밖에 없다. 전통유가와 현대사회와의 부조화를 사회적·문화적인 차원에서 현대인들에게 조화롭게 흡수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儒敎 本然의 相互倫理的인 理念으로 회귀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 바탕위에 우리 固有의 婚俗과 現代的인 風俗을 자연스럽게 혼합하여 새로운 傳統思想의 婚禮觀을 정립시킬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孔子가 말한 ‘文質彬彬’의 실천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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