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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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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온지학회 온지논총 온지논총 제23호
발행연도
2009.1
수록면
65 - 84 (2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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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조선초기의 유명한 문인이자 사육신인 매월당 김시습(1435~ 1493)의 기행 시집인 『四遊錄』의 일부인 『遊金鰲錄』을 통해 김시습과 경주의 여러 관련성을 연구한 것이다. 김시습은 장래가 촉망되던 유학자였지만 세조의 왕위찬탈을 계기로 승려가 되어 卍行을 떠났다. 이후 10여 년간 관동, 관서, 호남, 금오(경주)지역을 宕遊하며 남긴 「유관동록」, 「유관서록」, 「유호남록」, 「유금오록」의 합집인 『사유록』을 남겼다. 「유금오록」은 그가 7년간 경주에 머물고, 주변지역을 여행할 때 지은 시를 모은 시집인 만큼 김시습의 경주에 대한 인식과 경주에서의 생활이 잘 나타나 있다. 본고에서 전개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의 10년간의 宕遊는 현실 도피나 일상 탈출이 아니라 불교적인 깨침을 얻기 위한 卍行이었다. 『화엄경』의 선재동자가 깨침을 얻기 위해 53善知識을 찾아 불법을 물으며 수행한 것처럼 그의 탕유는 구도적인 목적을 가진 철저한 卍行이었다. 둘째, 그가 경주에 정착하게 된 동기는 세조의 왕위 찬탈과 관련이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모든 기반을 버리고, 부평초처럼 떠돌다가 새로운 고향 경주를 찾았다. 그가 경주에 정착한 이유는 경주가 시조인 김주원의 고향이었고, 김주원의 뿌리 잘린 삶에서 자신의 가슴 아픈 처지를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경주 정착은 근원적인 고향에의 회귀 의식 때문이다. 셋째, 그는 경주를 진정한 고향으로 여겼다. 경주에 정착하기 위해 나무와 꽃을 심었고, 경주 생활에 만족했다. 여행을 떠나거나, 마지막으로 상경한 이후에는 경주를 故山으로 여기고 오매불망 그리워하며 다시 돌아가고자 했지만 돌아오지 못했다. 넷째,김시습이 떠난 뒤에는 경주사람들은 계속 그의 절개와 의리를 추모하였다. 그가 거주했던 용장사 터에 梅月堂祠를 세우고, 해마다 추모제를 지냈다. 아직도 경주의 기림사에서는 해마다 그를 그리기 위해 제사를 지내며 그를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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