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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호 (경인교육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 국학연구 제37집
발행연도
2018.11
수록면
391 - 432 (4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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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국초부터 지방에 의원[<SUB>醫局</SUB>]을 설치하여 의료 혜택을 확산시키려고 노력했다. 한 도에 한군데 혹은 세 군데의 의원을 건립하고, 지방사족들 중 일부를 양성하여 의생으로 복무토록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향촌 사족들의 적극적인 협조 없이 성공하기 어려웠다. 이에 대부분의 지방관들은 간편하거나 실용적인 의서를 편찬하여 지방민들에게 보급하는데 만족하고 있었다. 영주의 의원 제민루는 내의원에 납입할 약재를 제조하고 관리하기 위해 국가의 주도 하에 세워진 공립 의원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제민<SUB>濟民</SUB>’의 뜻 그대로 향촌을 위한 환난상휼의 토대이기도 했다. 16세기 중엽까지 제민루는 향소<SUB>鄕所</SUB>와 학교 그리고 의원의 기능을 복합적으로 수행했다. 그러던 중 1591년 영주군수 이대진과 사족들이 의원규칙을 마련하고 운영자금을 확보하면서, 제민루는 본격적인 지방의원으로 자리 매김되었다. 임란 등의 전쟁으로 운영상의 문제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17세기 중반까지 꾸준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영주에 부임한 군수의 의지와 사족들의 협조 덕분이었다. 그러나 17세기 말 18세기 초반에 이르러 제민루는 의원으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하고 말았다. 18세기 중엽 영주의 사족들은 제민루 중건을 위해 건축비를 갹출하고 공사를 감독하는 등 의원의 부활에 앞장섰지만, 이후 치폐를 거듭하던 제민루는 19세기에 이르러 의원이라기보다 향소의 역할에 만족했다. 그리고 20세기를 거치며 의원으로서의 기억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목차

요약
1. 머리말
2. 제민루의 설립과 기능 분화
3. 제민루의 운영과 「잡물질」
4.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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