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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류미나 (국민대학교)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63집
발행연도
2019.2
수록면
227 - 261 (35page)
DOI
10.18496/kjhr.2019.02.63.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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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일본의 ‘데모크라시’의 흐름 속에 천황제와 국민 통합에 위기를 느낀 일본 정부는 ‘한학 진흥책’을 통해 ‘천황에 효’를 다하고 국가에 ‘충’을 바치는 ‘국민도덕’을 강화시켰다. ‘대동문화학원’의 설립과 황도유학을 기본으로 한 ‘일본 유교’란 개념은 이러한 사회적 배경으로 전개됐다.
1930년대 일본제국주의가 만주로의 확대를 꾀하면서 ‘황도유학’은 ‘동양도덕’이란 이름으로 식민지 조선과 대만, 만주로 전개됐다. ‘황도유학’의 본질은 대동문화학원의 교육 목적과 동일한, ‘황도 및 국체에 醇化한 유학’이며, 이는 ‘皇學’의 의미를 그대로 포함한 것이었다.
이러한 ‘황도유학’의 실현은 ‘내지’ 일본과 그 외 지역 간의 철저한 차별과 서열을 만들면서 진행됐고, 각종 의례는 그를 체현하는 장으로써 기능했다.
‘유시마 성당’이 일본 황실가의 친왕이 담당하는 사문회의 근거지로 활용되는 동안, 조선의 ‘경학원’은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 버렸다. 유시마 성당의 공자제는 ‘만주국’의 푸이(Pu-yi)가 참배를 올정도의 위치였지만, 경학원의 문묘석전은 남녀노소 구분 없는 관람의 장소에 불과해, 대중의 볼거리로 각종 가이드북에 실렸다.
일본제국주의가 확대되면서 ‘황도유학’은 점차 그 권위가 높아졌지만, 일본의 패전으로 그 이름은 신기루와 같이 사라졌다. 해방 후 조선의 경학원 역시 성균관이란 옛 이름으로 복귀되면서 ‘유교의 전통 기관’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우리에게 ‘전통’과 식민지와의 관계를 돌아보게 하고 그 흔적의 실태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키워준다.

목차

국문초록
1. 들어가며
2. 1920년대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전개와 ‘황도유학’의 필요성 대두 - 자유, 평등, 민주주의의 시대와 ‘대동문화학원’의 설립
3. 조선총독부의 ‘심전개발운동’정책 수행과 경학원의 ‘황도유학’ 전개
4. ‘황도유학’ 전개 속 부각된 서열화
5. ‘황도유학’으로 본 동아시아 신질서 구축
6.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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