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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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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진호 (충남대학교)
저널정보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충청문화연구 충청문화연구 제21집
발행연도
2018.12
수록면
253 - 310 (5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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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주의에 국권을 침탈당한지 8년 6개월, 3,107일인 1919년 3월 1일에 한민족은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민족 독립을 성취하여 민주 공화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 3·1독립운동은 독립운동 방법으로 다양한 형태로 독립을 주창하며 독립만세를 외치는 독립만세운동과 야간에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횃불독립만세운동 등의 형태로 전개됐다. 즉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거나 독립 관련 유인물과 격문들을 제작하여 배부하며 동지들을 규합하거나 군중들에게 권유하여 시장, 마을, 학교, 교회, 일제기관(면사무소, 주재소 등)에서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독립만세운동이 일반적인 독립운동의 형태였다. 반면에 야간에 산 위에서 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횃불독립만세운동은 3월 하순부터 4월 초순까지 중부지방, 특히 충남지방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됐다.
이 독립운동은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일반화됨에 따라 일제의 무력적 탄압도 잔혹성을 띠게 됐다. 따라서 누구나 주도 인사나 참여자로 독립 의지를 표출할 수 있는 방법과 일제의 탄압을 피할수 있는 방안 등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야간에 접근과 활동이 용이한 마을 주변의 산위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또한 불을 피워 인접 마을과 주민들에게 자신들의 독립만세 의지를 알렸다. 이 독립운동을 일제는 ‘篝火’, ‘焚火’ 등이나 ‘烽火’로 표기했고, 『매일신보』는 ‘불’, ‘화투불’, ‘봉화’, ‘거화’ 등으로 보도했다. 이를 독립만세운동과 대별하여 횃불독립만세운동이라 하고자 한다.
3월 23일 충북 청주의 강내면, 강외면, 옥산면 등지에서 주민들이 산위에 올라 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외치고 이어 충남 연기의 조치원 방면으로 이동했다. 이에 연기의 동면, 서면, 북면의 주민들이 호응해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충남지방의 횃불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됐다. 이후 연기에서는 3월 26일부터 4월 2일까지 26곳(회), 미상 일에 1곳에서 횃불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어 천안에서 4월 1일 병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이 있기 수 일전부터 병천 주위의 산위에 봉화가 올랐고 3월 30일 풍세에서는 주민들이 20곳의 산위에서 불을 피우고 만세를 외쳤다. 아산에서는 3월 31일부터 4월 3일까지 80곳, 공주에서는 4월 1일부터 3일까지 13곳, 예산에서는 4월 3일부터 5일까지 27곳, 홍성에서는 4월 4일, 5일, 7일에 26곳, 당진에서는 4월 4일과 5일에 22곳, 청양에서는 4월 6일부터 8일까지 6곳, 서산에서는 3월 31일과 4월 5일, 8일, 10일에 7곳, 논산에서는 4월 1일, 3일, 7일에 5곳, 미상 일에 2곳, 대전에서는 3월 29일에 1곳, 보령에서는 4월 17일에 1곳에서 주민들이 마을 주위의 산 위에 올라 횃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따라서 충남에서는 12개군 64개면에서 연216개 마을의 238곳(회)에서 가장 최소한으로약 13,000명이 참가하는 횃불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일제는 일경, 헌병, 수비대 보병 등을 출동시키고 일본인 민간인, 소방조, 재향군인 등까지 동원해 무력적 탄압을 했다. 현장 출동이 22차례나 하여 11곳에서 총기를 발포해 진압했다. 무력 진압으로 10명이 사망하고 13~4명이 부상을 당했다. 현장에서 체포 구금된 111명 이상의 인사들은 독립운동 이후 대대적인 검거 작전으로 체포당한 인사들과 함께 주재소, 경찰서, 헌병분견소, 헌병분대에서 악형을 당하며 심문조사를 받았다. 검사국에 기소되어 재판에서 형을 선고받은 인사가 48명이었다. 주도 인사나 참여자 대부분은 경찰서나 헌병분견소에서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인 잔인한 태형을 당했다. 수형 관련 기록을 분석하면, 참가자에 대한 체포와 태형의 집행이 4월 초순부터 지속적으로 자행되었고, 면 단위의 체포와 태형이 마을 단위로 실시되었으며, 동일 태형의 처분(형량)은 대부분 동일 형량으로 처벌됐다.
횃불독립만세운동은 3·1독립운동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발전적 형태로 등장하여 3월말부터 급속히 확산되어 마을 단위로 군(郡), 면(面)내 일대에서 대규모로 단시간에 집중적으로 전개됐다. 또한 마을들이 연합하여 아산, 홍성, 예산 등도(道)내의 내륙 산악 지역을 중심으로 동시 다발적으로 전개되었던 충남지방의 대표적인 3·1독립운동의 형태이었다.

목차

한글요약문
1. 머리말
2. 횃불독립만세운동
3. 충남지방 횃불독립만세운동의 전개
4. 충남지방 횃불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
5. 충남지방 횃불독립만세운동의 성격
6.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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