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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남중 (고려대학교)
저널정보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韓國史學報 제70호
발행연도
2018.2
수록면
73 - 105 (33page)
DOI
10.21490/jskh.2018.02.7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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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과 토착 세력의 위만조선의 멸망과 낙랑 지역에 대해 인식은 다양하였다. 한은 위만조선의 영향력이 끼친 전 지역을 복속한 것으로 여겼지만 토착 세력의 반발을 최소화하고자 기존 체제에 변화를 주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위만조선의 통제를 받던 여러 토착 세력은 위만조선의 멸망을 한과의 직접 교역을 방해하는 세력의 소멸로 인식하였을 따름이다. 위만조선의 멸망이 고조선 사회의 소멸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한의 통치에 반발한 세력도 있었다. 한은 낙랑을 군현을 설치한 지역으로 인식하면서도 중국과 구별되는 지역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면서도 낙랑을 교화가 이루어진 지역으로 인식하였다. 다만 한에 의해 교화된 것이 아니라 고조선 시기에 이미 교화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았다. 낙랑군 통치의 중심 지역에 있던 자들은 어느 정도 漢人의식을 지녔다. 그러나 낙랑 지역에는 낙랑국처럼 독립된 왕권을 지닌 세력도 있었다. 또한 한은 단단대령 동쪽의 세력을 예족으로 구분해서 보았다. 1세기 이전 낙랑 주변 세력들은 낙랑 지역이 한의 군현이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고구려와 신라는 토착 세력들을 중심으로 낙랑 일대 사회를 인식하였고, 백제는 낙랑군의 관할 지역을 제한적으로 인식하였다. 신라는 낙랑군이 아닌 낙랑국을 통해 낙랑을 인식하였다. 이것은 위만조선의 멸망으로 고조선 사회가 완전히 해체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위만조선 멸망에 대한 漢과 토착 세력의 인식
3. 1세기 이전 낙랑 지역에 대한 여러 인식
4.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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