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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상현 (부산대학교)
저널정보
역사문화학회 지방사와 지방문화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20권 제2호
발행연도
2017.11
수록면
99 - 132 (34page)
DOI
10.17068/lhc.2017.11.20.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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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초 울진의 재지사족 가문에서 출생한 남사고는 유생의 신분으로 한평생을 보냈다. 그러나 사후에 그에 대한 유학자들의 평가는 서로 엇갈렸다. 울진 유생들이 남사고를 지역의 사표로 지속적으로 추앙하는 가운데, 대부분의 유학자들 사이에서 남사고는 탁월한 예언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이러한 후대의 엇갈린 평가는 그를 바라보는 관점과 인식의 차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울진의 유생들은 남사고가 소학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고 후학에게 학문적 도움을 줬다는 점을 근거로 덕행이 높았던 유학자로 인식했던 반면, 일단의 유학자들은 그가 천문과 역학에 밝았던 점을 근거로 예언가로 인식하였다. 이렇게 인식이 엇갈리던 중 남사고의 예언이 유학자들 사이에서 확산되자, 인식은 점차 탁월한 예언가로 경도되어 갔다. 그로 인해 남사고를 덕행이 높은 유학자로 추앙했던 사람들조차도 그의 예언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현상은 남사고의 예언행위 여부에 대한 사실관계보다는 천문 역학에 밝았다는 인식과 남사고를 예언가로 평가했던 선학의 견해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예언가 남사고’는 유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초 남사고에 가탁한 비기가 등장하자, ‘예언가 남사고’에 대한 유학자들의 관심은 점차 식어갔다. 남사고의 비기가 사회적 문제로 불거지면서 그의 예언이 유학자들에게 부담과 기피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18세기 중반이 지나면 남사고의 예언은 유학자들의 기록에서 점차 사라지게 된다. 이후 ‘예언가 남사고’는 유학자들 관심에서 벗어나, 소외 불만 계층의 의해 보다 활발히 향유되고 재생산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목차

초록
1. 머리말
2. 16세기 울진 유림의 사표
3. 17세기 ‘예언가 남사고’의 탄생
4. 18세기 비기의 저자, 남사고
5.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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