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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형수 (한국국학진흥원)
저널정보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 국학연구 제30집
발행연도
2016.8
수록면
451 - 483 (3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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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조선사회에 매우 큰 충격을 역사적 사건이었다. 특히 전쟁의 피해가 가장 컸던 경상도는 전쟁 이후 새로운 질서를 모색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전쟁 이후 재건의 중심에는 사족<SUB>士族</SUB>들이 있었고, 이들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활동을 바탕으로 지역사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상주지역은 임란 초기 북천전투의 패배로 인하여 구심점을 잃고, 산속으로 숨어들어갔으나, 선조의 교서, 김성일의 격문 등을 근거로 김각<SUB>金覺</SUB> · 김홍민<SUB>金弘敏</SUB> · 이봉<SUB>李逢</SUB> 등이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전투하여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이들은 전쟁이 끝난 뒤 상주지역의 서애문인들을 중심으로 지역 사회의 재건을 도모하게 되었다. 이들은 향안<SUB>鄕案</SUB>의 중수, 향약<SUB>鄕約</SUB>의 시행등 예교(예의와 교화)를 우선으로 하는 개건 방향을 정하였으며, 그 중심인물은 김각 · 정경세 · 이준<SUB>李埈</SUB> · 이전<SUB>李㙉</SUB> 등이었다. 이들은 우선적으로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의국<SUB>醫局</SUB>인 존애원<SUB>存愛院</SUB>을 창설하여 의료활동을 전개하였다.
존애원은 의국으로 출발하였으나, 백수회<SUB>白首會</SUB>를 개최하고, 교육장소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존애원은 17세기 중엽 급격히 쇠퇴하였다. 1607년 도남서원이 창설됨으로 인하여 사족들의 교육공간으로서의 기능과 여론 형성 장소로서의 역할은 도남서원으로 넘어갔으며, 재정적인 문제로 말미암아 17세기 중반 이후에는 의국(병원)으로서의 기능도 상실하였다.
상주지역의 서애문인들은 상주지역의 현안이 전쟁으로 황폐해진 전답 등을 소복하여야 하는 것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충격은 이들에게 경제적인 소복보다는 다른 차원의 질서를 건립하도록 하였다. 전쟁과정에서 나타난 인륜의 파괴는 이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결국 임란 이후 질서 재편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로 예교의 복원을 들고, 이를 위하여 존애원의 창건과 향안의 중수 및 향약의 실시를 시도하였던 것이다.

목차

요약
1. 들어가는 말
2. 임진왜란과 상주지역 사족의 의병활동
3. 상주 서애학단西厓學團과 교화론敎化論에 입각한 지역질서 재건
4. 존애원存愛院의 설립과 상주사족의 결집
5.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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