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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방용식 (한국학중앙연구원)
저널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구 정신문화연구) 정신문화연구 2016 여름호 제39권 제2호 (통권 제143호)
발행연도
2016.6
수록면
179 - 207 (2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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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는 문명 충돌의 시기였다. 이 시기의 충돌은 문명의 교류과정에서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고 상대를 지배하려는 목적에서 의도된 것이었다. 유학의 가르침에 기초한 예의와 도덕지향적인 동양문명은 과학에 토대를 둔 물질과 자본지향적인 서양에 굴복했다. 서양 열강은 군사력을 앞세운 실력 행사(함포외교)로써 인도와 중국, 일본 등을 제압했다. 조선은 근대화와 제국주의화에 성공한 이웃나라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다른 형태의 문명충돌을 경험했다.
조선에서 문명의 충돌은 두 가지 모습으로 이해된다. 첫째, 관념적 차원에서의 충돌이다. 이는 위정척사 지식인들이 서양과 일본을 ‘중화문명론’에 근거해 배척한 데서 잘 나타난다. 중화문명론은 조선 지식인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인 전통적 관념체계였고, 17세기 중반 이후 조선중화주의로 수용되었다. 유인석은 조선중화주의에 입각해 중화인 조선을 침범하는 서양과 일본은 이적으로서 춘추대의에 따라 격멸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유인석이 항일의병 운동에 나서게 된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둘째, 정치적 차원에서의 충돌이다. 흔히 문명의 충돌은 정치적 충돌로 연결된다. 이런 까닭에 문명의 충돌은 민족국가 간의 경쟁으로 나타난다. 또 특정 국가의 지배적인 담론을 창출하는 정치사상의 대립으로 표출된다. 유인석은 이를 ‘중화 vs 이적, 금수’의 대립으로 상징화했다. 그렇지만 이적이나 금수라는 규정은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대응기제였고, 그만큼 현실적인 문제였다.
이 글은 두 가지 모습으로 전개된 문명 충돌 속에서 유인석이 위기상황에서 어떤 가치에 따라 위기를 극복하려 했는지 고찰했다. 이를 통해 유인석이 끊임없이 항일의병투쟁에 나선 이유는 단순히 ‘의기’에 의한 관념적 차원이 아니라 위기극복을 위한 현실적·정치적 차원이었음을 살핌으로써 유인석의 사상과 행동을 이해하는 폭을 넓히는 데 목표를 두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유인석과 중화문명론
Ⅲ. 국가적 위기 극복 방안
Ⅳ.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Abstracts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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