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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연구센터 국제지역연구 국제지역연구 제6권 제1호
발행연도
2002.4
수록면
189 - 217 (29page)
DOI
10.18327/jias.2002.04.6.1.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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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남아프리카에서 귀국 후 간디는 로우라트 법안에 반대하는 전국적인 사띠아그라하(비폭력 진리추구) 운동(1919)을 전개하였는데, 여러 곳에서 폭력사태가 발생하자 그는 잠시 시민불복종 운동을 중지하게 된다. 그후 그는 킬라파트(Khilafat)와 비협력(Non-Cooperation) 운동을 통해 다시 사띠아그라하 운동을 전개한다. 로우라트 사띠아그라하로 중앙 정치무대에 입성한 마하트마 간디는 킬라파트와 비협력 운동을 통해 인도 국민회의의 리더가 되고 이후 독립운동의 중심에 서게 된다. 킬라파트 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를 거둔 영국이 오토만 제국을 유럽과 아랍 지역으로 분할하려고 했을 때 인도의 무슬림들은 형제애로서 터키제국(Calipha)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신념에서 나온 영국에 대한 항의운동이었다. 비록 실패한 운동이었지만 간디는 형제 커뮤니티로서 힌두-무슬림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그 운동에 뛰어들었다. 킬라파트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비협력 운동이 나오고 이것은 1920년 이후 전국적인 반영저항 운동으로 이어진다. 간디의 비협력 운동과 자치의 요구는 민중의 독립 욕구를 일깨우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간디의 비협력 운동에는 자주독립, 불가촉 천민폐지, 힌두-무슬림의 결속, 모국어 사용, 입법, 사법, 교육기관의 보이콧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비협력 운동 기간 중 간디가 그렇게 비폭력을 주장하였지만 1922년 2월 24일 ``차우리 차우라`` 폭력사태로 비협력 운동은 중지되고 그는 3월 18일 기소되어 6년형을 선고받고 예라브다 형무소에 수감된다. 이후 독립운동은 잠시 혼란상태에 빠지나, 독립을 향해 그가 지핀 사띠아그라하 불은 인도인들의 가슴에 영원히 타고 있었다. 1919-1923년 사이의 마하트마 간디의 정치 사회적 활동 상을 살펴보는 것이 이 논문의 요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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