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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전호태 (울산대학교)
저널정보
고구려발해학회 고구려발해연구 高句麗渤海硏究 第52輯
발행연도
2015.7
수록면
209 - 240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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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구조와 벽화 내용으로 보아 고구려 장천1호분의 축조 년대는 5세기 중엽을 넘어서지 않는다. 427년 단행된 평양 천도로 말미암아 수도로서의 지위는 잃었으나 고구려에서 국내성이 지니고 있던 전통문화 중심으로서의 지위는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오랜 기간 고구려의 관습, 신앙, 제의 등이 성립되고 유지, 발전되는 과정에서 그 중심적 역할을 한 것이 국내성 지역이었던 까닭이다.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어 정착될 때 그 출발점으로 역할이 부여되었던 곳은 국내성이다. 광개토왕 시대에 불교신앙과 문화, 국가의 새로운 사회문화 중심으로서의 평양 개발이 본격화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 기간 기존 평양문화의 성격과 내용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고구려 전통문화의 색채는 약한 반면 漢系 문화를 포함한 각양각종의 문화가 뒤섞여 있어 이국적 성격이 강하였던 평양문화에 불교문화가 침투하여 자리 잡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평양과 달리 고구려 전통문화가 쌓여 있던 국내성 지역에서는 국가 차원의 불교신앙 장려정책이 강하게 작용하면서 불교문화가 새롭고 주요한 문화적 흐름으로 자리 잡는다. 5세기 중엽 연꽃무늬 고분벽화가 국내성을 중심으로 유행하는 것도 이러한 문화적 흐름에서 비롯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장천1호분은 국내성 지역을 중심으로 불교문화가 확산되면서 고구려인의 내세관에 어떤 변화가 초래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사례에 해당한다.
장천1호분은 5세기 전반 고구려와 중국 북조 및 내륙아시아 유목제국 유연 사이에 어떤 식의 문물교류가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장천1호분 벽화에 다양하고 빈번하게 나타나는 서역문화 요소는 고구려가 북위를 통해서 서역의 문물과 접하였을 뿐 아니라 유연을 통로로 삼아서 직접 서역과 교류하기도 했음을 알게 한다. 간다라 미술의 체취가 여전히 남아 있는 장천1호분 벽화의 여래도와 보살도는 서역으로부터 고구려로 불교문화가 직접 전해졌음을 뒷받침하는 증거자료라고 할 수 있다.
장천1호분은 고구려인이 전통적 가치와 관념에 기초하여 불교적 가르침을 이해하거나 재해석하기도 했음을 알려준다. 벽화에 보이는 남녀쌍인연화화생상은 그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장천1호분 벽화는 연꽃으로 장식된 공간을 거쳐 연꽃만의 세계로 들어가도록 벽화가 구성되고 제재의 배치가 이루어졌다. 이런 식으로 벽화의 제재를 구성하고 배치한 것은 연꽃과 연봉오리를 장식무늬로만 쓰지 않고 화면 밀도를 조절하는 도구이자 공간의 성격을 규정하는 장치로도 사용하려 했던 까닭이다. 장천1호분은 5세기 전반 국내성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불교신앙과 문화의 전파, 확산, 정착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생생한 회화 기록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고분개요
Ⅲ. 고분구조 및 벽화내용 분석
Ⅳ. 5세기 고구려의 불교문화와 장천1호분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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