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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재범 (경기대학교) 이광섭 (경기대학교)
저널정보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신라사학보 제31호
발행연도
2014.8
수록면
185 - 223 (3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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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는 重午日인 단오날에 출생하였다고 《三國史記》에 전한다. 5월 5일이면서 重午日을 찾아보면 850년(문성왕 12년)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궁예의 출생일은 850년 5월 5일로 일단 추정하였다. 日官이 궁예가 태어난 날이 불길하다고 한 까닭은 태어난 해의 간지와 같은 本命日이었기 때문이다.
문성왕대 신라의 정치상황은 균정계 진골귀족과 헌정계 진골귀족의 다툼으로 혼란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궁예는 850년(문성왕 12년)에 태어났고, 균정계로 태어난 궁예는 헌정계 진골귀족들에 의하여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되었던 것 같다.
궁예의 출생시에 빛과 광염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는 熾盛光如來의 출현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궁예가 태어나면서부터 치아가 있다고 하였는데, 도교의 存思三洞法이라는 수련법에서 叩齒라는 행위와 관련이 있다고 추정된다. 궁예의 생일인 5월 5일은 도교에서 黃帝의 숫자가 겹치는 날로 5가 겹치면서 통일을 이루는 군주의 날에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궁예는 신라의 기피인물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三國史記》의 찬자는 궁예의 생일을 아주 불길한 날로 표현하게 되었을 것이다.
태봉 당시의 사찰로 유일하게 이름을 알 수 있는 사찰은 勃颯寺이다. ‘발삽사’는 바꾸어 부르면 ‘木星寺’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철원경에서 치성광여래 및 星宿信仰과 관련된 사상이 넓게 퍼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궁예는 왕건세력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 원인 중 하나로 궁예의 사상과 왕건의 사상이 달랐던 것을 들 수 있다. 궁예는 한국사상 유일하게 ‘王卽佛’을 선언한 인물이다. 궁예가 ‘왕즉불’사상을 외친 배경은 치성광여래와 도교의 영향으로 생각할 수 있다. 치성광여래는 북극성을 부르는 불교의 부처인데, 치성광여래는 도교의 紫微大帝와 같은 격이다. 다시 말하면 치성광여래는 바로 현실적으로는 황제의 위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당시 선종?교종으로부터 배척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작제건으로 대표되는 왕건가의 사상체계는 관세음보살을 신봉하고, 寫經이라는 행위와 불경을 읽는 정통적인 교?선종의 수행방법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왕건은 선종과의 타협을 꾀하였다. 왕건은 궁예의 ‘왕즉불’사상에서 ‘僧侶卽佛’ㆍ‘王卽菩薩’사상으로 전환하였다. 이러한 전환은 불교계로 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을 것이다. 결국 궁예의 ‘왕즉불’사상은 ‘승려즉불’을 인정한 왕건의 종교정책에 밀려나게 되었으며, 정치적 사건으로까지 비화되었을 것으로 파악하였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궁예의 탄생과 天變
Ⅲ. 궁예불교의 성격
Ⅳ. 궁예와 왕건가의 사상적 대립
Ⅴ. 맺는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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