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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수태 (충남대학교)
저널정보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신라사학보 제29호
발행연도
2013.12
수록면
309 - 346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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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중대에 들어오면서 혼인풍속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국왕의 혼인방식에서 나타난 변화는 크게 주목된다. 왜냐하면 신문왕이 중국의 유교식 혼인의례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다. 친영례가 아니라는 것이다. 명사봉영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야 국왕에게 친영례가 비로소 시행되었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왜냐하면 이러한 혼인풍속은 중국에서도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던 당나라에 의해서 황제를 비롯한 황실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형식에서는 조금 변화를 주었지만, 친영례의 정신을 실천하려는 황제의 노력에서 나온 것이었던 것이다.
신라가 중국식 혼인제도를 수용한 것은 유교적 이념의 확산과 관련된 것으로, 결국 왕권의 강화를 추구하려는 정치적 목표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 더욱이 신라가 중국의 혼인제도 가운데 황제의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신라의 국가적 위치를 중국과 대등하게 놓으려는 외교적 동기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서 국왕 친영례의 시행을 통해서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추구한 새로운 천하관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신문왕의 혼인과 친영례
Ⅲ. 국왕 친영례와 명사봉영례의 관계
Ⅳ. 국왕 친영례의 시행배경
Ⅴ. 맺음말 -국왕 친영례의 지속여부에 대해서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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