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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張日圭 (한국학중앙연구원)
저널정보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신라사학보 제30호
발행연도
2014.4
수록면
157 - 196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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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새로운 《삼국유사》 판본이 공개되었다. ‘파른본’으로 불리는 이 판본은 왕력과 권1기이편만 남아 있다. 현재 왕력과 권1 기이편만 남아 있는 고판본은 필사 ‘석남본’《삼국유사》이기에, ‘파른본’《삼국유사》는 필사 ‘석남본’《삼국유사》와 비교될 수 있다. 다만 필사 ‘석남본’《삼국유사》의 기이편은 인출 시기가 뒤늦은 ‘순암수택본’을 그대로 轉載하였으므로, ‘파른본’《삼국유사》과 필사 ‘석남본’《삼국유사》의 비교는 왕력만을 다루어야 한다. 이 글은 ‘파른본’《삼국유사》과 필사 ‘석남본’《삼국유사》의 왕력에 대한 비교를 통해 판본간의 차이를 밝히고, 신라 하대기사의 특징을 살피고자 작성되었다.
‘파른본’과 필사 ‘석남본’을 비교하면, 동일점 13건과 차이점 14건을 확인할 수 있다. 13건의 동일점은 대체로 인출 과정이나 간행 과정에서 글자를 잘못 새긴 경우, 글자의 간격을 좁게 새긴 경우, 글자를 빼고서 새긴 경우, 이체자로 새긴 경우, 영인할 때 잘린 경우, 새겨놓은 글자가 뭉개져서 인출할 때 제대로 인쇄되지 않거나 겹쳐 잘못 나타난 경우이다. 이로써 보면, ‘파른본’《삼국유사》와 필사 ‘석남본’《삼국유사》의 신라 하대 왕력은 동일한 판본을 특별한 加筆없이 그대로 이용하여 인출하였다고 할 수 있다.
14건의 차이점은 대체로 판각의 실수나 판각된 글자의 뭉개짐, 이체자의 사용 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忠‘圻’대아간이나 [고어본문참조]符‘甲’午六, 그리고 ‘[고어본문참조]’등처럼 명확하게 서로 다른 판본을 저본으로 삼아 다르게 새긴 경우도 확인된다. 자연히 ‘파른본’《삼국유사》와 필사 ‘석남본’《삼국유사》에 보이는 신라 하대 왕력은 동일한 판본을 저본으로 삼아 인출하였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뚜렷한 차이도 있으므로, 서로 다른 판본을 각각 새겨 인출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신라 하대는 물론 上代와 中代의 왕력을 포함하여 살펴보면, 필사 ‘석남본’의 오류가 상대적으로 더 많기에, ‘파른본’ 《삼국유사》가 필사 ‘석남본’《삼국유사》보다 앞서 인출되었다고 보여진다. 결국 ‘파른본’《삼국유사》는 일연이 탈고한 원고를 새긴 《삼국유사》 초간본이 제작되고서 판목의 훼손과 글자의 누락, 이체화, 壞字化가 진행된 뒤에 기존 판본을 바탕으로 重刊된 판본이라고 생각된다.
‘파른본’《삼국유사》 왕력에서 눈에 띄는 점은 희강왕 외조부를 ‘忠‘圻’ 대아간’이라고 한 것, 경문왕 아버지 啓明 角干이 ‘義〈혹은 ‘[고어본문참조]’〉恭大王’으로 追封되었다는 것, 874년을 ‘[고어본문참조]符‘甲’午六’이라고 쓴 것, 효공왕의 이름을 ‘[고어본문참조]’라고 한 것, 경순왕 조부가 ‘官角‘[고어본문참조]’’이라고 한 것, 궁예가 처음 세력을 일군 곳을 ‘始投‘北’原賊良吉’이라고 한 것 등이다. 이 가운데 ‘파른본’《삼국유사》 왕력만의 특징은 희강왕 외조부가 ‘忠‘圻’대아간’이라는 것과 경순왕 조부가 ‘官角‘[고어본문참조]’’이라고 한 것만이 해당된다. 다만 경순왕 조부에 대한 기록과 함께 ‘신덕왕 외증조부가 元? 각간’이라고 한 ‘파른본’《삼국유사》 왕력의 기록도 《삼국사기》에 보이지 않으므로 함께 포함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파른본’왕력의 희강왕 외조부와 신덕왕 외증조부에 대한 기록은 모두 박씨 세력과 관련되었다. 또한 경순왕은 박씨 왕인 경애왕을 뒤이어서 왕위에 올랐으므로, 경순왕 조부에 대한 기록 역시 박씨 세력과의 관계를 가질 수 있다. 《삼국유사》 왕력에서 신라 하대 국왕의 성씨는 신덕왕ㆍ경명왕ㆍ경애왕을 제외하고는 김씨로 기재되었고, 왕비의 성씨는 특별히 기재되지 않았다. ‘파른본’왕력에는 박씨 세력과 긴밀히 연결된 희강왕 외조부와 신덕왕 외가 세력의 모습이 은연중에 기술되었다. 이것은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하였던 고려 말에 이미 신라 왕실의 외척으로서 박씨 세력을 드러내지 않는 분위기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곧 ‘파른본’《삼국유사》는 《삼국유사》 초간본을 重刊하면서, 고려 사회에 계승된 신라 문화의 영향 때문에 신라 왕실인 김씨 외에 다른 세력을 특별히 기재하지 않았던 셈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고판본 《삼국유사》과 ‘파른본’ 《삼국유사》의 서지 검토
Ⅲ. ‘파른본’ 《삼국유사》의 신라 하대 기사
Ⅳ. ‘파른본’《삼국유사》의 신라 하대 사회상
Ⅴ. 맺는 말
【참고문헌】
【日文抄錄】

참고문헌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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