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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정원주 (경민대학교)
저널정보
동북아역사재단 영토해양연구 영토해양연구 제8권
발행연도
2014.12
수록면
154 - 183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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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고구려 영역에 대해 『구당서』에서는 ‘동서의 길이는 3천 1백 리이고 남북으로는 2천여 리’라 하였다. 이러한 고구려 영역에 대한 기록은 이후 사서에서도 계속해서 인용되고 있다. 또한 그 서방 경계를 당의 요서 경영의 거점인 영주에 이른다고 하여 고구려가 요서까지 진출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고구려와 당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당의 공세에 고구려가 항상 수세적인 입장에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고구려 영역에 대한 기록은 고구려가 대당관계에서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구려의 요서 진출 양상은 648년 당이 고구려의 적봉진을 공격하였다는 기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적봉진은 거란의 근거지인 노합하 유역에 설치된 것으로 500명 이상의 군대가 지키고 있었던 군사기지로 추정된다. 또한 요하에서 이곳까지 고구려의 군사시설이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의 설치는 고구려의 요서 진출이 이전처럼 거란을 간접적으로 지배한다거나 수대의 무려라와 같은 소극적 방어 형태가 아닌 적극적인 형태의 군사 전략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면은 654년 거란의 아장이 있는 송막도독부가 위치한 신성 공격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고구려의 전략이 거란과 해를 대규모 당으로의 복속을 낳게 만들었고, 당은 이들을 도독부 체제로 개편하고 우대하면서 고구려에 대처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650년대 당과 고구려는 요서에서 충돌하게 되고 고구려는 적봉진을 상실하게 되면서 다소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요서에서 고구려군을 무력화시킨 당은 본격적인 고구려 원정을 시도하였다. 그 전초전으로 백제를 멸망시키고 여세를 몰아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 북방에서 철륵이 반기를 들게 되었고, 거란과 해도 당에 반기를 들게 되면서 더이상 고구려의 요서 진출을 견제하지 못하였다. 이후 거란은 고구려군과 같이 행동하는 모습이 보이고 있다. 이는 고구려가 멸망 때까지 그 영역을 보전하였을 뿐 아니라 요서 지역으로의 적극적 진출에 커다란 성과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목차

Ⅰ. 머리말
Ⅱ. 7세기 고구려 영역 관련 사료 검토
Ⅲ. 고구려의 서계에 대하여
Ⅳ. 요서를 둘러싼 고구려와 당의 갈등
Ⅴ. 맺음말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참고문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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