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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정민 (전북대학교)
저널정보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인문과학연구 인문과학연구 제43집
발행연도
2014.12
수록면
177 - 204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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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임진왜란 이후 두만강 유역의 藩胡에 대한 누르하치의 진출과 조선이 번호를 상실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조선은 건국과 더불어 주변의 여진인과 왜인의 來朝를 수용하며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를 구축해 나갔다. 비록 조선은 여진인과 왜인의 반발로 몇 차례의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이 질서를 임진왜란 이전까지 잘 유지하였다.
임진왜란의 발발로 조선은 번호의 내조를 수용하지 못하면서 기존의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이때 누르하치와 경쟁 관계에 있던 울라(Ula)의 부잔타이(布占泰)가 조선과 두만강 유역의 번호를 약탈하였다. 이에 북병사가 울라군을 공격하였다가 대패하였다. 조선은 번호를 부잔타이의 침입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했고, 부잔타이가 대조선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었다.
부잔타이가 번호를 강압적으로 거두어 가는 가운데 縣城의 번호가 끝까지 저항하며 누르하치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누르하치는 지원군을 보내 선조 40년(1607)에 鍾城의 烏碣巖에서 양군이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누르하치가 승리를 거두어 두만강 유역의 번호를 획득하였다. 반면 조선은 자신의 영토에서 벌어진 전투를 방관하며, 번호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누르하치는 오갈암 전투 이후 계속 번호를 거두어 갔고, 인조대에 이르러 남아있는 번호가 거의 없을 정도에 이르며 이 지역에 대한 중요성은 조선전기보다 감소되었다. 결국, 조선의 번호 상실은 누르하치의 세력 성장뿐만 아니라 조선의 대여진 정책과 함경도 지역에 대한 정책이 크게 변화되는 일대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누르하치와 부잔타이의 두만강 유역 진출
3. 烏渴巖 전투와 누르하치의 승리
4. 조선의 藩胡 상실
5.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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