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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선아 (전북대학교)
저널정보
역사문화학회 지방사와 지방문화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17권 제2호
발행연도
2014.11
수록면
101 - 126 (26page)
DOI
10.17068/lhc.2014.11.17.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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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재 이항은 연산군 5년(1499)에 한양에서 태어나 나이 40세에 전라도 태인에 낙향하여 학문에 전념하며 호남의 ‘人師’로서 제자를 키웠다. 이항의 제자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키는 등 창의에 앞장서서 의리를 실천하였다. 이항의 학문과 삶은 호남의 유생들에 의해 계승되었고, 이항은 ‘호남의 큰 스승[師表]’로 추숭되었다.
이항의 후손 이성익이 주도하여 『일재집』을 간행하는 과정에서 송시열, 박세채, 윤증 등 서인들이 적극적으로 후원하였고, 이 과정에서 이항은 호남의 道學者로서의 평가를 굳히게 되었다. 이러한 서인들과의 관계는 경신환국(1680) 이후 이항을 배향한 ‘남고서원’이 사액 서원이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남고서원은 숙종 10년(1684)에 김창흡과 전라도 유생 등 京鄕의 서인들의 요청에 의해 사액되었는데, 서인과 남인의 정치적 갈등이 격렬해지는 정국 하에서 서인의 주도하에 남고서원 사액이 결정되었다는 것은 그의 정치적, 사회적 지위가 서인과의 관계 속에서 공인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호남의 도학자와 사표로서 이항의 위상은 철종 7년(1856)에 정원용이 이항에게 시호를 내려달라고 요청하고, 고종 2년(1865)에 ‘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온 이후 확고해졌다. 또한 고종 18년(1881)에 이항을 비롯하여 ‘호남오현’을 문묘에 배향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이항은 호남의 대표적인 도학자로 다시 거론되었다. ‘호남오현’의 문묘 배향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결집한 호남 유생들은 남고서원의 중건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광무 3년(1899)에 이항의 후학과 호남의 유학들의 노력과 후원으로 남고서원이 중건사업이 시작되었고, 이때 이항의 제자 김점, 김복억, 김승적이 추향되었다. 사우를 중건하고 추향하는 일에 부안 김씨, 강진 김씨, 언양 김씨 문중과 이도복, 권순명, 김택술과 김형관 등 간재 전우의 직전, 재전 제자들이 참여하였다. 이항을 배향한 서원의 사액과 증시 등 公認되는 데에 시간이 걸렸지만, 그의 실천적 삶을 본받고자 하였던 호남의 유림들은 그를 호남의 ‘寓公’이자 ‘師表’로 추숭하였던 것이다.

목차

[초록]
1. 머리말
2. 『一齋集』 편찬과 남고서원 賜額
3. 이항에 대한 贈諡와 ‘湖南五賢’ 文廟配享 추진
4. 남고서원 중건과 『남고서원지』 편찬
5.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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