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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완우 (한국학중앙연구원)
저널정보
한국미술사학회 미술사학연구(구 고고미술) 美術史學硏究 第279·280號
발행연도
2013.12
수록면
171 - 202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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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암 강세황은 1744년(32세) 겨울에 安山으로 이주한 뒤 본격적인 글씨 학습을 시작하여 二王 즉 동진 왕희지·왕헌지의 고전 서풍을 법으로 삼고 北宋 米?(1052~1107)의 활기차고 변화로운 서풍과 元 趙孟?(1254~1322)의 복고주의 서풍을 더해갔다. 이왕의 고법은 그의 小楷에 잘 나타나며 행초에서는 기본 자형으로 나타난다. 또 미불의 서풍은 주로 행초에 보이며 조맹부의 서풍은 해서에도 보이는데, 30~40대 필적에서는 ‘米趙書風’으로 섞여 나타나기도 했으며 50대 이후로는 미불 서풍을 중점으로 하여 점차 자신만의 서풍을 이루어갔다.
이러한 과정이 바로 1766년(54세)의 「豹翁自誌」에서 “書法二王 雜以米趙”라고 자술한 그것이다. 이는 마치 강세황이 산수화에서 元 王蒙·黃公望을 전범으로 삼고 그들의 화풍을 계승한 明 沈周·董其昌 등을 학습하여 특유의 고상한 문인화풍을 이루어낸 것과 유사하다.
강세황의 서예는 18세기 서예사에 있어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그가 고전 서예의 전통을 꾸준히 견지했다는 점이다. 즉 한때 선배 李匡師의 변화로운 서풍이나 明 祝允明의 거친 초서풍을 따르기도 했지만, 이왕을 근간으로 하여 고법에 이해가 깊었던 미불과 조맹부를 크게 수용해갔고, 노년에는 미불 서풍에 바탕을 둔 明 董其昌의 평담한 서풍도 수용하였다.
다른 하나는 역대 서예에 대한 강세황의 시각이다. 그가 “왕희지의 올바른 맥이 당나라 四大家에 있으니 시대가 가깝기 때문이다. 黃庭堅·蔡襄은 당나라를 본받았고 文徵明·축윤명은 송나라를 본받았으니 지금 사람은 명나라 사람을 스승으로 본받지 않으면 안 된다” 했듯이 고법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가까운 시대로부터 단계적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시각은 전대의 명필 尹淳(1680~1741)이 왕희지를 이상으로 삼으면서도 唐宋元明 명적을 널리 수용했던 것과 다르지 않으며, 특히 강세황이 미불·동기창 서풍을 수용한 것도 윤순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하튼 강세황은 18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문인 명필로서 여러 추종자를 낳았는데, 그의 자손을 비롯하여 丁若鏞(1762~1836) 등의 남인계 문사가 대표적이며, 미불·동기창 서풍의 애호는 申緯(1769~1845) 등에 의해 19세기로 이어져갔다.

목차

Ⅰ. 강세황 글씨 기록 : 「豹翁自誌」와 「先君行狀」
Ⅱ. 표암 서풍의 기반 : “書法二王 雜以米趙”
Ⅲ. 조선 후기 18세기 書藝史와 강세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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