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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허지은 (서강대학교)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48집
발행연도
2014.8
수록면
171 - 222 (52page)
DOI
10.18496/kjhr.2014.08.48.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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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관계상에서 관수가 왜관에 처음 파견된 시기를 일본에서는 1637년에 파견된 平成連(우찌노 곤베(內野權兵衛))부터, 조선에서는 1639년에 파견된 平智連(嶋雄權之介(시마오 곤노스케))부터로 보고 있다. 조선에서는 국서개작사건 이후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들의 동향에 주목하고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고, 이듬해인 1636년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에서는 일본과의 분란을 가능하면 만들지 않기 위해 왜관의 일본인 단속을 강화할 목적으로 관수의 파견을 허락하고 관수 및 그의 솔속들에 대한 접대규정을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
쓰시마번에서 조선관련 업무를 담당했던 朝鮮方에서 작성하여 관수에게 주었던 館守調書 의 내용을 보면 관수가 왜관에서 수행했던 역할과 기능은 왜관 내 일본인들에 대한 통제, 조일 양국 통교에 관한 의견 제안, 조선 및 북경에 관한 정보수집 및 보고, 東向寺에 조일간에 왕래하는 문서사본 기록의 지시 등 조일간의 왕복문서의 기록과 관리, 왜관 안에서 근무하는 일본일들에 대한 제재 및 관리 등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일간에 관수제도가 확립되고, 1873년 메이지 정부에서 왜관을 침탈할때까지 100명이 넘는 관수가 조선에 파견되어 왜관의 총괄책임자로서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 가운데 네 차례나 조선에 파견되었던 도다 도노모는 역지통신 교섭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으며 고관수 시기에는 통신사강정재판으로 역지통신의 시행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근세 조일관계와 관수의 성립
3. 왜관에서의 관수의 역할과 기능
4. 관수 도다 도노모의 활약
5.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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