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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조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저널정보
한국교회사연구소 교회사연구 敎會史硏究 第44輯
발행연도
2014.6
수록면
185 - 215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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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조선 대목구장에 임명된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 주교는 끝내 자신의 임지에 부임하지 못하고 도중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 이유에 대해서 상세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본다면 샤를르 달레가 자신의 저서에서 지적하였던 내용이 통설의 자리를 점하고 있다. 즉 당시 중국 교회의 교구 조직 전반을 관할하고 있던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에 대해서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였고, 이 일로 말미암아 브뤼기에르 주교는 대단히 어려운 여행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급기야 조선 입국을 목전에 두고 병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본고에서 주목하는 것은 브뤼기에르 주교와 포르투갈 선교사들 사이의 갈등에 관한 문제이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대목구장에 임명될 당시에 조선 교회의 관할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남경 교구장 겸 북경교구장 서리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였다. 많은 교회사 서술들을 살펴보면 브뤼기에르 주교와 피레스 주교 사이에 모종의 불안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중국과 인접 국가들에서 활동하던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교황청이 포르투갈 국왕에게 부여한 특별한 권한, 즉 선교상의 보호권(patronatus)에 충실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므로 로마에서 조선 지역을 독립된 대목구로 선포하고 프랑스 선교사를 파견한 것에 대해서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내심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1773년 글레멘스 14세 교황이 예수회를 해산한 뒤에 아시아지역의 선교지 상황은 대단히 복잡한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이 때문에 통킹, 샴, 중국 사천 등지에서 활동하던 파리 외방전교회, 북경의 북당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서만자로 근거지를 옮긴 프랑스 라자로회, 북경의 남당과 남경, 마카오 등지에서 활동하던 포르투갈 라자로회, 복건에서 활동하던 에스파냐 도미니코회, 산서에서 활동하던 이탈리아 프란치스코회 등 여러 선교 단체들 사이의 친소(親疎) 관계가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고 하겠다. 심지어 동일한 선교회에 소속된 선교사들 사이에서도 알력과 갈등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브뤼기에르 주교에 대한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태도를 단지 보호권 수호를 위한 방해 책동이라고만 보아서는 안 된다.

목차

국문초록
1. 서론
2. 중국 여정에 대한 비협조적 태도
3. 직예 교우촌 억류 사건
4.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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