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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金台植 (연합뉴스)
저널정보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신라사학보 제22호
발행연도
2011.8
수록면
61 - 98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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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목은 신라 제31대 왕인 신문왕의 두 번째 왕비이면서 신문왕의 뒤를 차례로 이은 효소왕과 성덕왕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이런 그는 첫째 아들 효소왕이 재위하던 서기 700년에 세상을 떠난나. 따라서 그는 당시 신라를 포함한 동아시아의 정치 관례에 따라 남편인 왕이 죽고 그 아들이 즉위함에 따라 태후가 되었다. 이 글은 이런 신목과 관련한 여러 가지 의문점을 해명하고자 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첫째, 신목은 왕비로 책봉될 때 나이가 적어도 서른 살 이상이었다. 신목은 죽은 해(700)가 밝혀져 있지만,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의 아버지가 사망한 시점은 역사기록에 보이므로, 이를 근거로 추산할 때 왕비로 책봉될 당시 나이가 적어도 서른이 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는 일부 역사연구자도 지적했다. 당시 사회 풍속으로 서른 살이 넘도록 여성이 싱글로 남아있기는 대단히 곤란하다. 이 때문에 어떤 연구자는 신문왕과의 결혼이 신목에게는 재혼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둘째, 신목이 신문왕비로 책봉되었다는 역사기록은 신목이 이 때 신문왕과 재혼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후궁에서 왕비로 격상된 일을 지칭한다. 다시 말해, 신목은 몇 살 때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신문왕이 왕자로 있을 적에 이미 그의 후궁으로 들어갔다가 나중에 신문이 왕으로 즉위하고, 그의 정식 부인이 어떤 사건으로 그 자리에서 쫓겨난 뒤에 정식으로 왕비로 책봉된 것이다.
셋째, 신목은 남편인 신문왕이 죽고 아들 효소왕이 즉위하면서 태후가 된 뒤에는 왕을 대신한 신라 왕국의 통치자였다. 기록에 의하면 효소왕은 692년에 즉위해 10년을 왕으로 있다가 702년에 사망했다. 한데 그와 관련한 기록을 분선하면 효소왕은 즉위할 때(692) 6살에 지나지 않았으며 죽을 때(702)도 16살에 지나지 않았다. 이른바 소년 왕이었던 것이다. 이런 그를 대신해 그의 어머니이자 태후인 신목은 적어도 700년에 그 자신이 사망할 때까지 왕을 대신해 신라를 통치한 것이다. 어린 왕을 대신해 왕의 어머니가 그 왕국을 통치하는 제도를 전근대 동아시아에서는 垂簾聽政이라 한다.
넷째, 그런 점에서 신목태후는 제4의 신라 女主에 견줄 만하다. 신라는 建國主인 박혁거세 이래 마지막 경순왕에 이르기까지 천년 동안 모두 56명에 달하는 왕이 있었으며, 그 중 女王은 세 명이 확인되지만, 신목은 효소왕 시대 초반기 약 8년 동안 신라를 통치했다는 점에서 또 한 명의 女主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다섯째, 따라서 고대 일본의 연대기인 《續日本記》가 그의 죽음을 전하면서, 그를 신라의 ‘母王’이라 적은 것은 오류가 아니다. 많은 역사학자가 ‘母王’을 ‘王母’, 즉, ‘왕의 어머니’의 오류로 간주했다. 하지만 ‘母王’은 글자 그대로 ‘어머니로서의 왕’, ‘어머니 같은 왕’이라는 뜻이므로 이는 신목태후가 남편이 죽은 뒤에는 사실상 신라의 왕으로서 그 왕국을 통치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30대 노처녀 시집가기
Ⅱ. 金欽運과 그의 딸
Ⅲ. 失禮郞의 生還과 花郞의 부활
Ⅳ. 母王과 王母 사이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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