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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윤상원 (동국대)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7집
발행연도
2014.4
수록면
37 - 73 (3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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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18년 약관의 나이로 식민지 조선을 떠나 해방이 될 때까지 일제에 맞선 무장투쟁에 올곧게 헌신하였던 김홍일의 1920년대 전반기 항일무장투쟁 과정을 밝히려는 목적에서 작성되었다.
1918년 중국으로 망명한 김홍일이 목적지로 삼은 곳은 당시 중국 각 지역의 군벌들이 경쟁적으로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던 군관학교였다. 그는 처음부터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이루려는 뜻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귀주육군강무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항일무장투쟁의 길로 나서게 된다. 김홍일은 간도에서 군비단을 이끌고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하였으며, 연해주 이만에서는 군비단을 대한의용군으로 재편하여 중대장에 임명되고, 사관학교의 교관으로 활동했다. 이후 1921년 12월에 시작된 원동해방전쟁에서 김홍일은 대한의용군을 이끌고 혁혁한 공적을 세웠다. 그 공적으로 대한의용군은 한인특립보병대대라는 이름으로 하바롭스크 주변 일대를 수비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김홍일은 이 부대의 부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한인특립보병대대를 대규모 항일군단으로 조직하려던 김홍일의 꿈은 한인부대 내부의 갈등과 이를 핑계로 한 원동공화국 당국의 약속 불이행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한인특립보병대대는 해체되었고 김홍일은 이를 뒤로 한 채 중국령으로 돌아갔다.
이상 간도와 연해주에서 김홍일의 활동을 살펴보면 두 가지 사항을 알 수 있다. 첫째, 김홍일의 활동이 줄곧 항일무장투쟁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어쩌면 그가 귀주육군강무학교를 선택한 이후부터는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이후까지도 항일무장투쟁의 노선에서 한 번도 눈을 돌린 적이 없다. 둘째, 김홍일은 개별적 전투를 이끌기도 했지만, 그의 궁극적 목표는 항상 대규모 항일군단의 건설에 놓여있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그는 군비단을 이끌고 자유시로 향했으며, 자유시에서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고 난 뒤에는 연해주에서 항일군단을 조직하고자 하였다. 이는 그의 항일무장투쟁의 노선이 궁극적으로 독립전쟁론으로 이어져 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1920년대 전반기 김홍일의 항일무장투쟁은 대규모 항일군단을 조직해 일본과 독립전쟁을 벌이고자 하는 희망과 계획 아래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목차

1. 머리말
2. 망명-군관학교 졸업과 독립운동 참가
3. 군비단 군사부를 이끌고 연해주로
4. 대한의용군사의회와 대한의용군
5. 원동해방전쟁에 참가
6. 다시 간도로
7.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영문요약

참고문헌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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