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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李磊 (华东师范大学)
저널정보
중국고중세사학회 중국고중세사연구 中國古中世史硏究 第30輯
발행연도
2013.8
수록면
227 - 249 (2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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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宋 교체기에 국가의 권력 구조에는 이미 중대한 변화가 발생하였다. 皇權政治의 실질적인 운영과 작용, 그리고 門閥政治의 遺風 사이에는 비교적 두드러진 갈등이 발생하였다. 元嘉 年間 中期에 門關階層은 여전히 東晉의 玄學政治의 전통을 지속하고 있었고, 王敬弘·王球는 그러한 정치를 대표하고 있었다. 王敬弘과 당시의 저명한 隱士인 戴?·宗炳·郭希林·王弘之·孔淳之·沈道虔 등은 모두 긴밀하게 교류하였고, 謝靈運·顔延之 등의 名士도 역시 그들과 교류하였다. 이들 高門士族 출신의 名士는 “速而非隱”한 이들로서 士林들과 긴밀하게 접촉함으로써, 그들의 언행은 세간의 모범이 되었으며, “有識歸重”한 여겨졌다. “逸”에 근거하여 政治體制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였고, 이를 통해 士風을 이끌었으니, 이것이 바로 兩晉 시대 이래의 玄學政治의 전통인 것이다.
元嘉時代의 皇權政治의 운영과 작용은 士林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고, 이로 인해 執權者는 “乏才”하였다는 비난을 늘상 받게 되었다. 元嘉 後期 劉宋 朝廷의 門閥階層에 대한 政策은 “以淡退求之”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門閥階層은 사실상 玄學政治의 理想을 포기하였고, “淡退”의 태도로써 皇權政治와 소극적으로 공존하였다. 玄學의 의식형태와 정치현실 사이에 균열이 발생한 것이다.
劉宋 孝武帝 時代부터 皇權의 專制는 兩晉 시대 이래로 이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했던 최고 수준에 달하게 되었다. 孝武帝는 권력을 행사함에 있어 더 이상 士林의 輿論을 의식하지 않았으며, 아울러 士大夫가 사회의 의식영역에서 누리고 있었던 권위와 지위를 전면적으로 침범하였는데, 정치적 입장으로 士大夫의 언행을 평가하였으며, 士大夫가 기반하고 있던 道德傳統의 사회적 評價를 억제하여, 士大夫의 人格과 精神의 獨立性을 박탈하였다. 나날이 확장되고 남용되던 皇權 앞에서, 士林의 輿論은 이미 이에 대적할 역량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皇權의 권위와 士林의 輿論 사이의 대립의 발생은 皇權이 주동이 된 것이다. 宋初부터 皇權은 敎化를 시행하는 존재로 더욱더 자임하기 시작하였고, “抑揚名敎”라는 명목으로 門閥의 社會意識과 권위를 침탈하여, 사상과 정치 영역에서 皇權의 전면적인 권위 수립하였다. 이러한 목표는 劉宋 元嘉時代에는 달성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孝武帝에서 明帝에 이르기까지 “懷猜忌以待下”의 40여년의 시간이 흐르고, 즉 門閥階層의 “茸靡圖全之習”이 이미 형성된 이후, 南齊 永明 年間에 이르러, 門閥階層은 주동적으로 儒家의 皇道意識으로 회귀하였는데, 이는 王險이 이끌던 永明弘儒에게서 확인해 볼 수 있다. 門閥階層은 의식형태의 영역에서 皇權政治와 주동적으로 협력하여, 齊梁 시기의 새로운 국가체제 건설에 있어 중요한 역사적 前提를 형성하게 되었다.

목차

一、引言
二、“望自署空”?“逸” - 晋宋之?的士?
三、元嘉“乏才”?“以淡退求之”
四、孝建、大明之世的因言?罪
五、“抑?名?” - ?宋?立皇??化?威的??
六、永明弘 - 士林??向皇??威的妥?
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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