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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유승희 (서울시립대)
저널정보
부산경남사학회 역사와경계 역사와경계 제87집
발행연도
2013.6
수록면
85 - 109 (2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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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조선시대 야금제의 운영과 실태를 살펴본 것이다. 정부의 야금제도의 운영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한성부의 경우 야금제는 도성 안에 집중되었다. 정부는 광활한 도성 밖 보다는 도성 안의 야간 통행금지를 강화하였다. 도성 밖의 순라는 임의적 성격이 강해 야금의 신칙이 불가했으며, 경작처가 많은 지역적 특성상 야금을 시행하면 농민의 왕래에 방해가 되는 난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물금첩의 발행은 야간 사무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지만 오히려 야금을 혼란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조선후기 물금첩은 남발되었을 뿐 아니라 신첩과 구첩이 혼용되는 등 관리가 미흡하였다. 더욱이 각 관사마다 자체적으로 물금첩이 작성되어 야금을 더욱 혼잡하게 하였다
셋째, 범야자와 이를 제어하는 순라군간의 갈등이 심하였다. 범야자의 대부분은 국가의 하급관속으로, 이들은 소속 관사의 위세를 믿고 야금을 범하였다. 그 과정에서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부류와 이를 제어하는 포청, 순청의 관리들과의 갈등이 나타나 집단 폭력과 범야 탈거(奪去)자가 발생하였다.
이처럼 조선시대 야금제는 운영상의 문제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치안유지를 목적으로 국가가 도시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실시한 제도적 장치였다. 비록 야금의 위반이 경범죄였지만,『일성록』?이나 『추조결옥록』에 범야자에 대한 기록과 처벌이 제시되어 있을 정도로 이를 단속하여 백성을 통제하려는 국가의 의지는 강하였다. 이러한 조선시대 야금제는 1895년에 폐지되었지만, 일제 강점기 이후 1982년까지 개인 활동의 자유가 보장된 현대 시민들의 행동을 억압하는 주요한 동력을 제공하였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야금제의 시행과 야간 순라
Ⅲ. 범야물금첩(犯夜勿禁帖)의 발행과 야금
Ⅳ. 범야인의 실태와 순라군과의 갈등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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