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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해준 (공주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역사민속학회 역사민속학 역사민속학회 제41호
발행연도
2013.3
수록면
49 - 71 (2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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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이 갖는 문화사적 성격은 국가적 제사처로서의 계룡산, 불교문화 성지로서의 계룡산, 그리고 풍수도참 신앙과 관련한 계룡산 등의 세 가지로 크게 요약될 수 있다. 이중 계룡산이 역사상에서 크게 부각된 시기는 조선시대이며, 본고는 이를 대변하는 계룡산신사와 중악단의 문화사적 의미를 조명해 본 것이다.
본고에서 필자는 중악단과 관련하여 원래의 계룡단 위치, 그리고 현재의 신원사, 중악단 자리로 옮겨온 시기, 한말 중악단의 성격이 왕실과 관련되면서 성격이 변천되는 문제,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계룡산 산신제의례 복원의 역사성과 현재성 등을 살펴보았다.
계룡산신사의 성격은 삼국-고려시대의 산천신제의를 이어 조선시대에도 국가제사처로 선정되어 태조 2년에 智異山, 無等山, 錦城山, 鷄龍山, 紺嶽山, 三角山, 白嶽의 여러 산과 함께 「護國伯」으로 작호를 받았고, 세종대에 명산이라 하여 小祀로 정하여 매년 봄, 가을에 香과 祝文을 내려 제사하였다. 조선초기의 계룡산신사는 기록상 神祠가 있었던 것으로도 기록되고 壇으로도 기록되어 정확하지 않으며, 위치도 계룡산 남쪽으로만 표기하여 현재의 중악단 [신원사]이었다는 확증이 없다. 따라서 자료의 소개와 이를 통한 추정을 하였고, 한말 중악단의 성격변천과 재해석 문제(왕실관련 성격)은 그간 착종과 혼돈이 있는 부분을 재정리하여 밝혔다.
중악단의 건립시기와 명성황후로 상징되는 왕실의 지원 배경과 과정은 일반 산신제나 국가제사[소사]와는 다른 형태로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하여 건물의 격이나 건축 구조도 내외삼문을 갖춘 祠廟 형태이며, 건물의 잡상, 화담 등 궁실건축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1876년과 1891년의 계룡산에 대한 왕실의 관심으로 현재의 중악단이 중건되었으나, 1903년 대한제국의 5악제도가 다시 마련되면서 중악의 대상이 달라졌다. 이로써 중악단의 국가제의는 사실상 1903년 이후는 중단되었을 것이고, 이후 일시 지방관의 치제나 아니면 민간화가 진전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계룡산 산신제의는 역사와 전통의 계승, 복원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너무나도 박편화되고 굴절된 것이 많다. 그리하여 복원보다는 다소 굴절되었을지라도 현전하는, 복구가 가능한 자료들을 기록화 하는 작업이 더욱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목차

[국문요약]
1. 머리말
2. 삼국-고려조의 계룡산제
3. 조선 초 계룡산신사의 위치
4. 계룡산신사의 형태
5. 계룡산신사와 중악단의 문화사적 의미
6.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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