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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金世民 (하남역사박물관)
저널정보
한국문화사학회 문화사학 文化史學 第38號
발행연도
2012.12
수록면
103 - 120 (1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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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시 상사창동 법화골에서 남한산성 북문 방향 능선에 있었던 법화사는 병자호란 당시 전사한 청나라 장수 양고리의 원찰로 알려져 왔다. 1956년에 쓰여진『남한비사』에서 양고리와 법화사와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고,『하남시사』에도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태종의 매부였던 법화장군 양고리가 원두표장군의 계략에 걸려 전사하자 후에 청나라 태종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이 절을 세웠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대동지지』는 청나라 장수 양고리가 남한산성이 아닌 광교산에서 전라병사 김준용 휘하에 있던 朴義의 포에 맞아 죽은 것으로 기록하였다. 실제로『인조실록』이나『병자록』등에서는 김준용의 광교산 전투를 기록하고 있고,『 남한지』나『연려실기술』등도 양고리가 광교산 전투에서 전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필자가 검토해 본 결과도 양고리는 남한산 북문 밖에서 전사한 것이 아니라 광교산 전투에서 전사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법화사의 건립은 양고리가 법화골에서 전사했다는 배경 하에 성립된 것인데, 양고리가 남한산이 아닌 광교산에서 전사했다면 법화사의 건립을 양고리와 연결시키기에는 무리가 따를 수 밖에 없다. 광교산에서 전사한 양고리의 명복을 빌기 위해 원찰인 법화사를 광교산이 아닌 남한산에다 창건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목차

요약
Ⅰ. 머리말
Ⅱ. 楊古利설화
Ⅲ. 남한산성 북문 전투
Ⅳ. 광교산 전투
Ⅴ. 맺음말
【Abstract】

참고문헌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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