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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성혜 (동국대학교)
저널정보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한국학논집 한국학논집 제46집
발행연도
2012.3
수록면
85 - 116 (3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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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汶汀 이말량(李末良, 1908~2001) 선생은 경주에서 태어나 10대에 함흥 반룡권번盤龍券番으로 가서 전통 가무악歌舞樂의 교육을 받았고, 20대와 30대까지 그곳에서 활동하고 생활하였다. 그러다 40대 초반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1984년 은퇴기념공연을 하기까지 경주에서 활동한 예인藝人이었으나, 지금까지 음악학계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1999년 『형제줄풍류』 음반에 이말량이 연주한 가야금풍류 염불과 타령이 실려 출반되었고, 2010년 그가 연주한 가야금풍류 전바탕과 양금풍류 세영산부터 우조가락 도드리까지의 음원이 악보와 함께 출시되었다. 그런데 이말량이 연주한 음악이 누구를 통해서 계승된 음악인지, 그리고 이말량의 실력이 당대에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한 것등은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래서 본고는 이말량에게 가야금풍류를 비롯하여 전통 가무악을 전승시킨 이말량의 스승들에 대해서 알아보고, 당시 스승들의 음악적인 배경과 지명도 또는 능력을 파악하여 이말량 음악의 계통을 밝히고자 시도한 글이다.
연구의 결과 이말량은 함흥에서 여섯 분에게 지도를 받았고, 경주에서는 한 분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양금풍류 전바탕은 아악부 출신의 박경원에게 배웠고, 가야금풍류 전바탕은 가야금의 명인 정용운에게 배웠다. 양금 풍류의 경우 경제京制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 반면 거문고풍류와 단소풍류를 경주에서 최창로에게 배웠는데, 이것은 경주 향제鄕制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최창로는 일제시대 때부터 경주 율방에서 최윤과 함께 활동하였고, 1950년대 후반에 동도국악원의 사범을 하였고, 1960년대까지 오직 경주에서 활동한 붙박이 예인이기 때문이다. 결국, 풍류음악에 있어서 이말량은 함흥에서 익힌 아악부 계통의 경제와 경주 풍류의 사범에게 익힌 경주향제를 모두 보유했다고 볼 수 있다. 가야금산조는 정용운과 정남희에게 배웠는데, 정용운제는 이미 1980년대에 가락을 잊었다고 하므로 이말량의 가야금산조는 정남희제일 가능성이 크다. 가야금병창도 정용운과 정남희에게 배웠는데, 분명한 것은 적벽가 중 〈새타령〉은 정용운제이며, 〈어화청춘〉은 정남희제이다.
춤 분야의 경우, 검무는 박경원에게 배웠다. 박경원은 아악부 출신의 사범이었기 때문에 궁중에서 연행한 검무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승무는 한성준과 김계선에게 배웠는데, 김계선이 한성준의 제자였으므로 이말량의 승무는 한성준 → 김계선 → 이말량의 계보가 형성된다. 마지막으로 조금화는 이말량의 양모養母이면서 보조 스승이었다. 이말량은 조금화가 지도한 교육 내용을 뚜렷하게 거론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승무 · 검무 · 화관무(포구락 등에 능했기 때문에 이를 포함한 춤의 기본기를 전승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듯 그의 춤 실력은 온전히 함흥에서 박경원과 김계선 및 한성준과 조금화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글에서 이말량의 가 · 무 · 악 계보를 파악하기 위해 그의 스승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이것은 이말량이 남긴 음원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단서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이말량의 스승들
Ⅲ. 이말량과 이소향
Ⅳ. 맺음말: 이말량에 대한 새로운 이해
참고문헌
〈Foreign language abstra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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