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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성호 (부산대학교)
저널정보
부산경남사학회 역사와경계 역사와경계 제82집
발행연도
2012.3
수록면
95 - 135 (4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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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최충에게 붙여진 ‘유종, 문헌, 해동공자’와 같은 다양한 칭호를 부여 받은 학자도 드물다. 그 칭호에는 북송성리학의 영향과 함께 문묘종사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초기 세종대의 문묘종사 논의는 실현되지 못하지만 해주 지역 향교에서는 성종대에 독자적으로 종사하다가 국가로부터 철훼당하고 있다. 해주에서는 중종대에도 재차 종사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조광조가 펼친 소학 운동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이후 이황의 영향으로 ‘문헌서원’이 건립되었고, 기대승은 ‘공맹의 심학(心學)과 기자의 홍범구주의 수를 아는자’로 인식하였다. 또 율곡 이이는 해주향약에서 최충을 추숭하고, 직접 문헌서원 학규를 저술한다.
최충의 학문이 ‘심학’으로 인식된 이후에는 ‘이학(理學)’을 정자?주자 보다 먼저 밝혔다고 주장하고, 홍양호도 같은 인식을 보이고 있다. 이런 영향으로 화해사전(華海師全) 에서는 결국 최충을 주자성리학의 시조로 인식하게 된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장지연은 최초로 최충과 호원을 직접적으로 비교하게 되고, 드디어 최충을 최자(崔子)’로 호칭하는 저서가 등장한다. 최충의 후손인 최경식이 저술한 최자전실기이다. 이 책에서 여사제강 을 인용하여 최충을 호원의 ‘호소지교(湖蘇之敎)’와 비교하지만 실제로는 송대사기강의를 그대로 전사한 것이다. 이후 쓰인 글들 중에는 이 오류를 무비판적으로 인용하게 된다. 이런 오류에도 불구하고 최경식은 최충을 ‘최자(崔子)’라고 존숭하는 평가를 최초로 시도하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후의 학자들은 공묘(孔廟)에 종사되는게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목차

Ⅰ. 머리말
Ⅱ. 고려시대
Ⅲ. 조선전기
Ⅳ. 조선후기
Ⅴ. 근대
Ⅵ.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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