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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최연식 (목포대학교)
저널정보
역사문화학회 지방사와 지방문화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14권 제1호
발행연도
2011.5
수록면
349 - 371 (23page)
DOI
10.17068/lhc.2011.05.14.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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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는 珍島에 관한 역사 자료에 대한 재검토를 통하여 三別抄 이전 시기 珍島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구체적 이해를 시도하여 보았다. 먼저 珍島라는 명칭의 語源이 되는 因珍島에 대해서는 珍이라는 글자가 ‘달(달)’이라는 고유어를 기록하는데 사용되었다는 것을 토대로 본래 ‘인달(달)섬’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고, ‘인달(달)’은 주변 지역에 있는 ‘무달(달)(=무등)’산, ‘유달’산, ‘승달’산, ‘한달’산 등과 마찬가지로 산의 명칭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진도를 대표하는 산의 이름이 ‘인달(?)’산이었고, 그것에서 섬의 명칭이 비롯되었다고 본 것이다.
현재 일반적으로 古郡面 古城里에 있는 古城을 고대 및 고려시기 珍島縣의 治所로 보고 있지만, 현재의 성은 조선초에 쌓은 것으로서 그 이전의 治所城으로 보기 힘들다. 고대 및 고려시대의 治所城은 대부분 平地 근처의 야트막한 山 위에 위치한 山城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평지와 연결되어 있는 경우에도 산과 평지를 연결하는 포곡식 산성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고성리의 고성 지역에 고려시대까지의 치소성이 있었다고 보기 힘들다. 고려시대까지의 치소는 현재 古城 근처의 산지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말 왜구를 피해 육지로 옮겼던 진도현이 조선초에 섬으로 복귀하면서 이전 치소 근처의 평지에 성을 쌓아 새 치소를 마련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전기 현종대 재상이었던 崔士威가 왕명을 받아 진도의 占察院을 개창하였는데, 이는 고려시대 진도 불교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왕명으로 창건된 점찰원은 진도현의 중심적 사찰로서 기능하였다고 생각되며, 명칭으로 볼 때 占察信仰을 중시하였던 眞表系 法相宗 사찰로 추정된다. 진도현의 대표적 산인 점찰산(첨찰산)의 이름도 이 사찰에서 비롯되었다.
진도는 무인정권과 각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최씨정권 3대 집정자 崔沆은 승려 시절 진도의 사찰을 거점으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고, 무인정권 말기에는 國史를 진도로 옮겨 봉안하게 하였다. 삼별초가 對元항쟁의 거점으로 珍島를 선택한 배경에는 그러한 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된다.

목차

[초록]
1. 머리말
2. 珍島의 古名 因珍島의 起源에 대하여
3. 고대ㆍ고려시기 珍島 治所의 위치에 대하여
4. 11세기 전반 占察院의 등장
5. 崔氏政權과 珍島
6.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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