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광복 이후부터 현재까지 서울 서빙고동 지역(region)과 지역사회(regional community) 혹은 지역민, 그리고 그들의 공동체 의례의 변화와 연관성을 살피고 이를 토대로 ‘지역’과 ‘지역사회’ 그리고 ‘지역문화’를 축으로 하는 사유적 틀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는 것이다. 먼저, 광복 이후 서빙고 지역의 변화를 살펴보면, 광복 이후 한국전쟁 전까지는 이주민이 계속 유입되면서 인구가 꾸준하게 증가하였다. 그러나 지역 경제는 열악했으며 주거 환경 역시 불안정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당시 한강전선을 두고 벌어졌던 치열한 포격전은 서빙고 일대를 초토화시켰으며 이는 지역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인구는 2,000여 명에서 1,000명 이하로 줄었고 가옥 및 산업 시설은 거의 파괴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지역이 차츰 재건되는 듯 했으나 1970년대 후반 무렵의 반포대교 및 반포로, 서빙고로 등의 건설은 그나마 남아 있었던 원주민들을 대거 퇴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한국전쟁을 시작으로 하여 폐허와 복구, 이주민의 급격한 유입과 원주민의 이탈 등 불안정한 지역 상황이 인구의 감소와 지역 停滯라는 결과를 낳게 되었던 것으로 보았다. 여기에는 미8군의 주둔지와 보안사 분실 등으로 말미암아 지역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무허가 판자촌과 노동자 집단 거주지라는 이미지 또한 지역 발전을 저해했던 요소였다고 보았다. 다음으로 지역사회의 변모 과정을 살펴 보면, 광복 이후 ‘보건친목회’와 같은 지역 조직을 운영하면서 한국전쟁 전까지는 일제시대의 지역사회 구도를 유지했다고 보았다. 즉, 수원 백씨나 강음 단씨 등 토착 세력들이 여전히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1946년 보건친목회의 회원이 300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 한국전쟁 이후 지역사회는 차츰 ‘재건위원회’와 같은 조직을 구성하여 재건을 도모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불안정한 지역 상황과 이주민의 급격한 유입 등으로 인해 원주민과 이주민 간에 심각한 갈등이 빚어졌고 1970년 이후에는 지역조직이 대폭 축소되었다. 이후 경로회와 ‘부군당치성위원회’ 등의 조직이 지역사회를 주도했으며 2000년을 전후로 지역사회의 주도권이 타향출신들에게 넘어가게 되었던 것으로 보았다. 그 다음으로, 의례의 전승 과정을 살펴 보면, 광복 이후 전쟁 전까지 부군당 제의는 꾸준하게 전승되었다. 특히, 지역사회의 규모가 가장 컸었던 1946년이 부군당 중수에 참여한 인원도 가장 많았던 것으로 보았다. 전쟁 이후에도 제의가 지속되기는 했으나 준비 주체가 이미 경로회로 축소되고 있었다. 1973년 부군당이 서울시 민속자료로 지정되면서 활력을 되찾은 듯 싶었으나 1980년대 불거진 부군당 대지 매각에 대한 법정 싸움으로 말미암아 또 한 번의 시련을 겪게 되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는 무속식 당굿과 유교식 제의가 공존하고 있었으나 1995년을 기점으로 당굿은 중단되었다. 이후 유교식 祭次 역시 점차 간소화되었고 추렴과 반기가 생략되기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른 지역ㆍ지역사회ㆍ의례의 세 축의 변화를 비교해 본 결과 지역의 급격한 변화에 비해 지역사회와 의례는 비교적 완만한 변화를 보였으며 특히 지역사회의 경우 지역이 심각하게 변형되었다고 하더라고 지역사회는 빠르게 회복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의례의 경우는 비교적 지역사회의 변화와 맥을 같이 하지만 물적 토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변화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지역의 변화가 물적 토대와 관련이 있다면 의례 역시 이에 영향을 받아 변화하게 됨을 알 수 있었다.
This paper address the study of the change and relation of region, regional community, and ritual of Bugundang in Seobinggo-dong, Seoul after Independence. And this paper tries thinking tools about ‘region’ axes, ‘regional community’ axes, and ‘regional cultual’ axes. At first, try to see how change of Seobinggo-dong after Independence. It was shown that the number of the inhabitants was reduced and regional development was stagnated since Korean War in 1950. The reason is that instability of regional situation was continued, so being ruined and recovery from the Korean War, the sudden increase in numbers of moved people into the Seobinggo-dong from the country and native parted from Seobinggo-dong and so on. Secondly, try to see how change of community, the community such as ‘保健親睦會’, a fraternity of health was operated just after independence and ‘再建委員會’, a committee of reconstruction tried to reconstruction after Korean War. But it was shown that the community was decreased after 1970. After this ‘敬老會’, the community of old people and ‘致誠委員會’, a committee of the ritual are led the community, and readership of the community was transferred to people who were born other region after 2000. Thirdly, try to see how was continued the ritual of Bugundang, it was continued constantly from independence to Korean War. Specially the number of people who were taken part in the rituals at Bugundang was most many in 1946. The ritual of Bugundang was continued after Korean War, but the group who arranged for the ritual of Bugundang was decreased, for example ‘敬老會’(the community of old people). ‘당굿’(ritual by shaman) and confucian riual were performed simultaneously until the middle of 1990's, but ‘당굿’ was stopped since 1995. Lastly, the results that it was compared with ‘region’ axes, ‘regional community’ axes, and ‘ritual’ axes are regional community and ritual are changed slowly but region is changed with a run. And regional community is recovered speedily though region was destructed seriously. Comparatively ritual kept abreasted with regional community, but changed sensitively by material bas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