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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아시아여성연구 아시아여성연구 2006년 제45집 2호
발행연도
2006.11
수록면
195 - 239 (4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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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구한말 고종의 계비였던 엄황귀비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그녀는 문벌이나 지위의 도움 없이 자신의 책략과 기민한 행동으로써 여성 최고의 지위에 오른 뒤 근대적 여성교육을 위해 적극 노력했던 인물이다. 그녀는 자신의 정치력과 대담성을 바탕으로 아관파천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자신의 아들을 대한제국의 황태자로 책봉받게 함으로써 사실상의 국모에 버금가는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여성이었다.
엄상궁은 5세에 궁녀로 입궁하여 내전상궁이 되었고, 민비를 가까이에서 모시다가 고종의 승은을 입었다. 그러나 민비의 질투로 1885년에 궁궐 밖으로 쫓겨났다가 1895년에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시해 당하자 곧 바로 고종의 부름을 받아 재입궁 하였다. 다시 입궁한 엄상궁이 수행한 가장 큰 정치적 역할은 아관파천으로, 근왕세력들과 손을 잡고 고종과 세자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안전하게 도피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러시아 공사관에서 고종의 숙식을 전담하고 정신적으로도 고종에게 위안을 제공하며 근왕세력의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고종의 아들을 잉태하고 대한제국의 선포와 때를 같이 하여 영친왕 은을 낳음으로써 정식 후궁인 귀인에 책봉되었고, 이후 순빈 → 순비 → 황귀비로 승격되었다.
왕비가 없는 상황에서 엄비는 왕비나 다름없는 지위를 가졌으며 공식적 비공식적인 임무를 수행해 나갔다. 그녀는 특히 시대적인 요구를 잘 파악하여 여성교육이 무엇보다도 절실하다는 것을 알고 이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녀는 인재양성에 뜻을 두고 사재를 들여 양정의숙을 지원하는가 하면 진명여학교와 숙명여학교의 전신인 명신여학교를 창설하였다. 이외에도 수시로 교원들과 학생들에게 필요한 경비와 학용품을 지원해 주었고, 사회활동과 자선활동을 통해 여성의 역할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인해 고종이 강제로 왕위에서 물러나고 영친왕이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끌려감으로써 인간적인 시련을 겪었다. 결국 1911년 여름 일본이 내세운 공식적인 병명은 장티푸스였으나 실제는 14살의 영친왕이 고된 군사훈련을 받으며 주먹밥을 먹는 활동사진을 보다가 감정이 북받친 나머지 가슴이 막혀서 5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구한말 격동기에 엄황귀비가 수행했던 많은 정치적, 사회적 역할은 이후 여성의 근대화와 사회적 활동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여성발전에 초석을 다져놓았다.

목차

논문요약
Ⅰ. 머리말
Ⅱ. 순헌황귀비 엄비의 생애
Ⅲ. 순헌황귀비 엄비의 정치ㆍ사회활동
Ⅳ. 결론
참고문헌

참고문헌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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